바람소리에 풍경소리가 더해진다. 각박한 세상살이 할퀴어지고 헐뜯긴 마음이 바람을 더한 은은한 풍경소리에 치유된다. 마치 깊은 산속 조용한 외딴 사찰에 온 기분이다.한 때는 구수한 판소리 다섯마당이 채워져 있던, 전주한옥마을의 터주 대감 역할을 하고 있는 고택 ‘학인당’. 이 집은 앞으로는 전주천이 감아 돌고, 그 너머로 승암산, 남고산성, 곤지산이 내려다보고 있는 지세를 갖추고 있다. 학인당은 몸과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행복으로 포만감을 느낄 수 있어 다시 찾는, 시간을 멈추게 하는 공간이다. ▲전주한옥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춘성정 이담손 고가(이웅재 고가)는 조선중기의 건축양식을 간직한 왕실가문의 집으로 이곳은 뒤로 낮은 산이 길게 뻗어 있고 앞으로는 섬진강 지류가 흘러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마을 앞으로 넓은 들판이 있어 사람이 살기에도 좋은 조건을 갖춰 백제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또한 교통의 요충지로서 아랫마을에는 백제산성이 있고 내륙에 속하는 이곳은 임실과 장수·남원·순창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지정학적 요충지여서 1439년에서부터 1700년까지 261년간 오수찰방이 있어 11개 역을 관할하기도 하였던 곳이다. 이처럼 길지이다 보니
▲창원정씨 종가 (전북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 580)전북 장수군 산서면 사계리에 창원 정씨 종가(宗家)와 정상윤 가옥이 있다.장수읍 대성리 비행기재를 굽이굽이 올라 넘어서면 내리막길 아래로 드넓은 산서면의 황금들판이 펼쳐져 있는 사계리 조그마한 마을에 자리잡은 창원정씨 종가와 정상윤 가옥을 만날 수 있다.창원 정씨의 시조는 정덕성(丁德盛)으로, 당나라의 문종과 선종 때 대승상을 지냈고 대양군(大陽君)에 봉록되었다. 그러나 곧 참소를 당하여 조선에 유배되었는데, 이때가 신라 문성왕 때이다. 정덕성의 둘째 아들인 정응도(丁應道)가 신라
김상만(金相万 ) = 호는 일민(一民). 전라북도 부안 출생. 동아일보의 설립자 김성수(金性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생애 및 활동사항]1930년 중앙고보를 졸업한 후 영국 런던대학교 정경대학(School of Economics & Political Science)에 유학하였고, 1940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으며, 1985년에는 일본 와세다대학으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49년 동아일보 이사로 언론계에 투신한 이래 45년간 동아일보사의 사주(社主)로서 군사정권과 맞서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였으며, 그가 재임하
고택(古宅)은 말 그대로 오랜시간이 흐르며 인간의 보금자리 역할을 해온 옛날의 집을 말한다. 우리의 역사를 담은 대표적인 고택(古宅)은 한옥을 꼽을 수 있다. 물론 고택을 한옥으로만 단정지을 순 없지만 우리의 전통은 한옥만큼 익숙하게 떠오르는 고택이 없다.고즈넉한 한옥에 향긋한 나무냄새에 취해 한껏 자연을 느낄 수 있는 한옥. 한옥으로 지어진 고택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아 맑은 공기를 가슴에 품는다면 이보다 더좋은 행복감이 또 있을까?물론 도시생활에 너무나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는 생활이 복잡하고 이용의 불편함으로 편안함을 느
예향 전라도에서도 결코 빛이 바래지 않는 고을, 숱한 애국지사를 배출한 충절의 고장. 바로 정읍이다.새삼스런 설명이 필요 없지만, 구태여 정읍을 얘기하자면 내장산국립공원과 구절초테마공원을 비롯한 천혜의 자연경관을 갖추고 있는 관광도시이다. 또 근대사의 여명을 밝힌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정신과 1천 여년의 세월을 넘어 전해오는 백제가요 정읍사(井邑詞)의 숭고한 사랑이 살아 숨 쉬는 역사와 문화의 고장으로 이름 높다.그뿐인가! 정읍은 윤봉길, 이봉창의사와 함께 우리나라 독립운동 3의사로 추앙받고 있는 구파 백정기의사 등 숱한 애국지사를
박록주, 박초월과 함께 현대 판소리사를 대표하는 國唱(국창) 김소희(金素姬, 1917-1995)는 전북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에서 태어나 20세기에 활동한 판소리 여성명창이다. 본명은 김순옥(金順玉)이며, 호는 만정(晩汀)이다.중요무형문화재 제5호로 판소리중 춘향가, 서편제 예능보유자인 만정 김소희는 맑고 고운 애원성의 독특한 음색을 지닌 천부적인 예술가로 태어났다는 평가를 듣는다. 그녀는 13세때 남원명창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고 15세에 송만갑 문하에서 심청가, 홍보가를 익히며 본격적으로 판소리에 입문했다.일찍이 천재성을 알아본 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박준승 선생은 1899(고종)년 11월 14일 임실 청웅면 옥석리 아랫배치(주치마을)에서 아버지 박호진(朴昊鎭)과 어머니 복씨(卜氏)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이고 자(字)는 성래(聖來)이며, 천도교 도호(道號)는 자암(?菴)이다. 그의 가정으 ㄴ빈곤하였으나 글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7,8세경부터 서당에 나가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10세가 지나자 같은 또래들을 가르치기도 하여 애기 선생이란 칭찬도 받았다. 그가 17세 되던 해에 청웅 남산리로 이사해 1890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6월은 일제강점기 35년의 식민지하의 역사를 몸소 겪으면서 가난과 투병의 고통스러운 생활고 속에서 평생을 집필에 전념해 소설, 수필, 희곡, 동화 등 1000여편의 작품을 남기고 49세의 일기로 일찍 세상을 마감한 군산 출신 백릉 채만식 작가 추모 65주기를 맞이하는 해이다.일제 강점기 군산의 암울한 사회 현상과 노동자, 농민 하층민들의 비참한 삶을 과장 없이 객관적 관찰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다수의 작품들을 통해 작가의 문학과 발자취를 찾아가 본다.▲재주많고 영리했던 유년시설과 가정환경= 채만식작가의 부친 채규섭은 향학열이 남달라
“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면 조선인이 스스로 자각, 깨우쳐서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 기술을 배워서 익히고, 식품과 생산품을 자체 조달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 인촌(仁村) 김성수(1891-1955)는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개량주의를 주장했다.정치가, 교육자, 언론인, 기업인, 근대주의 운동가였던 김성수는 고창출생으로 민란과 화적떼를 피해 이주한 부안 줄포에서 자랐다. 자는 판석(判錫), 호는 인촌, 본관은 울산이다.고창 부안면 인촌리에서 유학자 김인후(金麟厚) 13대손으로 김경중과 장흥 고씨 넷째 아들로
전북 김제시 백산면에 있는 초가(草家)로 조선 말기 실학(實學)의 대가였던 석정 이정직선생(이석정)이 살았던 전북 기념물 제 21호 생가가 옛 향기를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다.석정 이정직(石亭 李定稷, 1841~1910) 선생은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 해학 이기(海鶴 李沂, 1848~1909)과 함께 조선 말엽 실학의 대가로서 '호남의 삼절(三絶, 三才 또는 三傑로도 불림)'로 불리고 있다.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에서 태어난 근세 실학의 대가 석정 이정직(李定稷)[1840~1910]은 근대 성리학
한 장의 흑백사진, 한 사내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한다. 카메라 렌즈를 매섭게 쏘아보는 사내는 ‘녹두장군 전봉준’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여명을 밝힌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바로 그 눈에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못다 이룬 혁명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기필로 뜻을 이루고 말리라는 기개 넘치는 눈, 그리고 눈빛...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오늘 나는 알겠네들꽃들아그날이 오면 닭 울 때 모여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귀를 기울이라(서울로 가는 전봉준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 보다.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천둥은 먹구름 속에서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고창출신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의 대표 시 ‘국화 옆에서’다.우리나라의 대표적 시인이자 대중에게 사랑받는 아름다운 시들을 많이 남긴 시인, 대중에게 가장 지탄받는 시인이기도 한 미당
“하늘에는 항상 해와 달과 별빛이 비치지만 내 가슴 속에는 일편단심 나라를 구하는 것뿐이다. 천추에 오직 내가 하여야 할 일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 바쳐 죽는 일이요, 이것만이 나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임실군 성수면 삼봉리 죽전마을 3대 독자로 태어나 왜적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국권을 탈취하려고 하자 굳건히 떨쳐 일어나 구국활동에 목숨을 바친 정재 이석용 의병장. 1914년 4월. 36세 젊은 나이로 가슴 뜨거운 생을 마친 그는 죽는 그 순간까지 피 끓는 마음으로 조국 독립을 향한 강렬한 의지를 외치다 대구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
일상을 벗어나 훌쩍 떠나고 싶다면 태고적 신비를 간직한 대 자연과 충절의 논개 정신이 살아있는 있는 전라북도 장수군으로 역사여행을 가보자.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젊은 나이에 왜장을 껴안고 진주 남강에 투신한 의암 주 논개가 태어난 고장이다.논개는 1574년(선조 7년) 9월 3일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에서 훈장 주달문과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사망후 모녀는 숙부 주달무 집에 의탁하다가 주달무가 논개를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보내려하자 어머니와 외가에 피신했다가 체포되어 장수관아에 수감되었다
지난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유적지가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곳이라면,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는 익산 문학의 대표적인 성지라고 할 수 있다.2016년 병신년 새해를 맞아 역사와 미래가 공존하는 문화의 도시로 힘차게 출발하고 있는 익산지역 문학의 대표성지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가람이병기 선생의 생가를 찾아가보았다. ▲현대 시조의 아버지가 태어난 곳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진사마을에 가면 1901년에 건축된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가 잘 보존되어 있다.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는 1973년 6월 지방기념물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