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미디어

박영학(원광대 교수)

이(李) 정부에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 기왕에 쌓아온 질서를 망가트리지 않는 것으로 위안을 삼으려 했다. 그게 기대라면 기대였다. 그런데 미디어 장악에 혈안인 이(李) 정부의 어제 오늘이 걱정을 넘어 주먹을 쥐게 한다. 집권당에 유리한 여론을 생산하겠다는 속셈이 가감 없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개인이 미디어를 추구하는 동기는 다양하다. 일상 생활속의 미디어는 즐거움, 친밀감, 감시, 해설을 제공하고 시청자는 그 점을 즐긴다.
즐기려는 욕망 또는 쾌락은 인간의 기본적인 본능이다. 뉴스의 극적인 현장이나 각종 쇼를 즐긴다. 덮어둔 책을 읽듯 미디어의 인정미담에 젖는 수용자는 한순간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미디어를 이용하여 얻는 가장 큰 만족은 미디어의 내용을 타인과 나누는 재미이다. 뉴스 줄거리, 운동 경기, 연예계의 화재거리는 날마다 만나는 친구, 친척, 직장동료, 기타 이웃과 이야기꽃을 피우는 주요 재료이다.
또한 친밀감(companionship)을 제공한다. 고독하고 외로운 병실의 환자에게 신문 방송은 친구처럼 다정한 정서를 제공한다. 친구를 필요로 하는 사람 또는 친구를 그리워하는 내용을 선사한다. 이런 것을 ‘의사사회적 상호작용(parasocial interaction)’이라 한다.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을 실제로 자주 접촉하는 사람처럼 착각하고 친밀감을 느끼는 경우가 그런 좋은 예이다. 의사사회적 상호작용에 연루된 사람은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과 한통속이라는 느낌을 즐긴다.
미디어의 사회 감시 기능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리는 임무를 수행한다. 일상생활은 개인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살지만 충족시킬 대상을 똑바로 알기는 힘들다. 여행길은 나서는 사람은 일기 변화에 민감하다. 미디어가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 정보를 제공하는 이유이다. 새로운 직장이나 가구를 찾는 사람은 신문의 구인란이나 상품 광고를 뒤적일 것이다. 이런 감시는 개인 차원을 넘어 나라와 이웃 국가로 확장된다. 국회가 국방비를 얼마나 증액할까. 교육세는 얼마나 늘까. 연금제도는 어떻게 바뀔까. 이런 문제는 전체 국민의 큰 관심사이다.
감시는 세계적인 범위로 확장될 수 있다. 동남아시아의 쓰나미 사태가 그곳 주민들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을까. 중동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긴장은 어떻게 될까. 이런 많은 질문은 개인적인 배경에서 이루어진다.
미디어가 사회를 감시하여 많은 사람을 만족시키지만 세상일의 전부는 아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개인차원에서 파악하기는 결코 쉽지 않는 일이다. 왜, 누가, 무엇이 원인인지를 아는 일은 더욱 어렵다.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는 더욱 알기 어렵다. 수용자는 그런 일의 원인을 알고 싶을 때 해설을 찾는다.
대통령의 지도력에 동의하려면, 집권여당의 정책에 동의할지 여부를 결정하려면, 독자는 신문의 사설을 읽는다. 청취자는 토론을 듣고 해설을 청취한다. 예산 국회가 첨단 무기 배치를 위해 국방비를 증액하면, 그 결과는 미국방위산업의 배를 불리는 데로 귀결된다는 점을 눈치 빠른 청취자들은 금방 알아차린다. 우리나라 첨단무기 도입선은 거의 미국산일 뿐 아니라 자체 제조 능력이 미약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한반도의 분단구조는 빨리 척결되어야할 지상 과제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심지어 타인이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방법을 탐구하기 위해, 즉 그 반대 입장을 취하기 위해, 해설을 찾을 수 있다.
일상생활속의 미디어는 이처럼 중요하다. 그걸 집권당의 입맛대로 요리하겠다는 발상은 미디어의 제4부적 기능을 말살하는 폭거다. 오는 봄 정국은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은(春來以不似春) 기간이 길어질 것만 같아 지금부터 불안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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