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 페스와 선정주의 보도

박영학 (원광대 교수)

최근 한 사이코 페스의 연속 살인사건이 밝혀져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TV와 신문을 통해 이 사건을 접한 수용자들은 입을 모아 분노를 터트렸다. 급기야 피의자의 안면 공개 문제가 사건의 중심으로 변질되었다.
이번 사건은 피의자의 안면 공개 여부가 문제의 핵심일수 없다. 오히려 한국 저널리즘의 오랜 병폐인 선정주의 보도 태도에서 찾아야 한다. 일주일동안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관련 보도를 통해 수용자들이 이 사건에 세뇌되었다는 표현이 더 적실할 것이다.
이 사건은 한 정신병자의 연쇄 살인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경찰이 검거한 혐의자를 공개하여 수용자들의 공분을 촉발한 이유가 없다고 보여 진다. 그것도 마스크를 씌워 결과적으로 절묘하게 공분을 유도한 꼴이 되었다.
저널리즘은 사건의 객관적 보도를 금과옥조로 삼는다. 그러나 전체 미디어들이 수많은 사건의 홍수 속에 특정 사건을 계속 부각시켜 연일 떠들어 대면 수용자들은 그런 보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 지점에서 미디어는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을 넘어서서 동시대의 의제를 설정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이게 미디의 의제설정(agenda setting) 기능이다.
저널리즘은 사이코페스 사건보다 그 무렵에 발생한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을 의제로 설정하는데 힘을 써야 맞다. 철벽같은 거대 조직에 맞서 힘겹게 생존권을 지키려는 나약한 철거민 개개인의 저항을 보도의 초점으로 삼았어야 옳다.
용산 철거민 사망사건은 특정지역 재개발과 관련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들춘 사건이다. 그런데 언론보도는 엉뚱하게도 사이코페스의 살인사건에 중심을 두었다. 개발이익에 눈이 어둔 가진 자들의 편에 서서 의제설정을 스스로 방기(放棄)한 꼴이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단면 노출을 아찔하게 비껴간 이런 보도는 천박한 통치편의주의와 결부되어 인명손실을 가볍게 취급했다. 당연히 용산 철거민 사망 사건을 뒷전으로 밀리고 이에 더하여 경찰의 과잉진압보다 철거민의 생존권을 위한 농성의 불법성이 부각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 말은 사이코 페스 사건은 경찰의 과잉진압 문제로 번져 이후 촉발될 수 있는 이 정권의 부적절한 대응 논란을 잠재웠다는 뜻이다.
철거민 사망 사건은 급기야 살인정권으로 진화 발전될 내연성을 지닌 정쟁의제 이다. 이처럼 미디어는 언뜻 보면 사건의 객관적 보도에 충실한 듯하지만 깊이 따져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이코 페스 의제(agenda)에 함몰된 수용자들의 분노는 엉뚱하게도 마스크를 씌워 공개된 범죄자의 인권문제로 비화 되었다. 의제 감이 못되는 사안이 주 의제(main agenda)로 자리 잡더니 급기야 안면공개 여부로 진화 발전되었다. 선정주의 보도의 전형이다.
이미 경찰은 이전 흉악범 사건에서 안면을 공개한 전력이 많다. 그럼에도 이번 경우는 마스크를 씌워 공개했다. “죽여도 싼 판에 마스크를 씌우느냐.”는 비난이 일었다. 살인마에게 인권이 무슨 소용이냐는 말도 들렸다.
다른 한편에서는 형법상의 무죄추정의 원칙을 들었다. 형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라는 법원칙에 충실하려는 입장이다. 두 입장은 첨예하게 맞설 수 있다. 짚고 넘길 사안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언론보도가 신중해야 한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아마 모든 국가의 형법이 지닌 근간일 것이다.
범인의 안면공개는 사건과 무관한 제3자의 분노에 대한 일시적으로 지나치는 심리적 보상 외에 더는 얻을 것이 많지 않다. 오히려 범죄 혐의와 무관한 주변 사람들이 평생 안고 살아야할 업보에 멍에 하나를 더 얹어줄 뿐이다. 분별 있는 보도는 그래서 중요하다.
사이코 페스를 향해 “죽여, 죽여.”를 이끌기 보다는 용산 철거민의 생죽음에 대한 공분(公憤)으로 승화 시켰어야 맞다. 언론보도가 그걸 몰라서 사이코 페스에 집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