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식 전주대학교교수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신선한 유머를 많이
한 사람으로 유명한 윈스턴 처칠이 수상
이던 시절, 교통 체증으로 의회에 30여분
가량 늦게 도착한 처칠에게 한 야당의원
이“총리님, 조금만 더 부지런 하시면 안
될까요. 총리님은 게으름뱅인가요?”하고
묻자, 처칠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처럼 아름다운 부인이 있는 사람은
침상에서 일찍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다
음부터 의회에 나오는 날 전날 밤은 아내
와 따로 자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처칠은 지각한 사실을 구구하게 변명하
지 않고, 오히려 부인의 아름다움을 은근
히 자랑함으로써 곤란한 질문을 은근슬쩍
넘기려는 능청을 부리고, 많은 의원들은
웃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다뤄지는 문제들
이 대개 심각한 일들이어서 토론 분위기
가 무거워지게 마련인 의회에서 유머 한
마디가 토론 참가자들의 기분을 일신시켜
토론의 진행을 촉진시키는 활력소가 된다
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유머로 자신의 곤란한 처지를 넘길 만
큼 여유가 있는 영국의회는 소수의 의견
을 존중해서, 중요한 법률안이나 의안에
대해 야당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도록
노력하는 전통으로도 유명합니다. 행정부
도 야당의 수렴 가능한 의견은 끝까지 받
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의회도 소수 야당
의원들이 충분하게 발언하도록 배려함으
로써 국민여론을 제대로 정책에 반영하겠
다는 겁니다.
의원들은 의회에서 벌어지는 논의를 연
설(speech)이 아니라 토론(debate)이라고
합니다. 연설만 하게 되면 준비해 온 것
만을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이 돼 진정한
의미의 의견교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
화 형식의 토론을 통해 의견을 활발하게
주고받자는 것입니다. 의원들은 토론대상
인 사안에 대해 전문 지식을 갖추고 토론
에 임하고, 욕설과 삿대질 대신 기발한 위
트와 유머로 상대를 제압하려고 애를 씁
니다. 어쩌다 의원의 발언도중에 발언자
의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란해지면
의장은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서
고, 그러면 발언자는 물론 수상이나 야당
의 당수라 할지라도 모두가 입을 다물고
숙연히 자리에 앉습니다.
토론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야당의 의견
이 어느 정도 반영되었는데도 야당이 계
속 반대하는 경우에는 다수결로 결정을
합니다. 그러면 야당도 표결을 결사 저지
한다든가 하는 행위는 절대로 하지 않고,
표결에서 지게 되면 깨끗이 승복합니다.
그리고 야당의 주장이 끝까지 옳다고 여
기면, 다음 번 선거에서 그것을 중요쟁점
으로 삼아 이기도록 노력합니다.
이것이 세계인의 눈에 비치는 영국의
회의 모습입니다. 그 조그마한 섬나라가
세계를 행해 큰소리를 칠 수 있는 힘의
원동력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
까? 1992년에 당시 국회의장이었던 박준
규 씨는 어느 책에 쓴 추천사에서‘타협
의 묘미를 알지 못하는 답답한 정치, 당
리당략의 이용물이 되는 국회, 허울 좋은
권력투쟁 무대에 불과한 의사당, 물리적
인 폭력행사와 다수결 강행, 질책, 규탄,
욕설, 실력행사 등이 판치는 너무나도 낯
익고, 또 그래서 식상한 우리 의회정치의
현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992년의 대한민국 국회의장이 묘사한
그 당시 우리 국회의 모습인데, 17년이 지
난 지금 모습이라고 해도 하나도 틀린 데
가 없을 정도입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
한다는데,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뀔 시간이
지나도 국회의원이 해머로 국회의사당 문
을 때려 부수는 장면이 외신으로 세계 각
국에 전송되고, 폭행을 당해 침대에 누워
있는 사신과 격투기 선수처럼 헤드락을
걸어 넘어뜨리는 사진으로 꾸며진 광고가
슨 훈장처럼 연일 신문지면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입니다.
우리나라의 품격을 상징한다는 국회가 한
발짝의 진전도 없이 오히려 퇴행하는 모
습을 보이고 있는 행태가, 그리고 그런
행태를 보이고 있는 국회의원들을 번번이
믿고 찍어준 내 자신이 참으로 답답하고
한심한 마음에 영국의회의 멋진 모습을
한 번 그려보면서, 불가(佛家)에서 말하
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을 떠올려
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인연에 따라 생긴 것으로 영원불변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국회의원
들은 제발 오늘의 여당이 내일의 야당으
로 될 수 있고, 오늘의 야당이 내일의 여
당으로 바뀔 수 있다는 진리를 잊지 않았
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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