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마을의 형성과 은행로, 한옥교육의 활성화

조법종(우석대 사회교육과)

전주의 한옥마을의 형성은 우리의 근현대사와 밀접히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진 이후 우리나라에 대거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인들이 전주에도 들어오면서 처음 거주하였던 곳이 서문밖, 지금의 다가동 근처의 전주천변이었다. 서문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의 거주지역으로 당시 성안과 성밖은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전주성 진입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주-군산간의 교통을 위해 전군가도가 만들어지면서 성곽의 서반부가 철거되었고 1911년이래 전주성곽이 풍남문을 제외하고 철거되면서 일본인들이 전주성안으로 진입하는 상황과 연결되어 형성되었다. 즉, 1930년을 전후로 일본인들의 세력확장에 대한 반발로 전주사람들은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인 주택에 대한 대립의식과 민족적 자긍심의 발로였다. 1930년대에 형성된 교동, 풍남동의 한옥군은 일본식과 대조되고 화산동의 서양풍의 선교사촌과 신흥, 기전학교, 예수병원 및 교회당 등과 어울려 기묘한 도시색을 연출하게 되었다. 또 많은 일본인들이 지금의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거주하였는데 지금도 한옥마을내에서 일본풍의 집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후 한국전쟁의 여파로 전주로 피난 온 많은 피난민들이 눌러 앉으면서 도시 외곽에 거주지가 형성되었고, 1960년대 이후 본격적인 도시개발이 이루어짐으로써 대규모 인구유입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한옥마을은 1950년대 말 한옥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가 시행된 이래 40여년동안 개발이 제한된 상태에서 2000년대 초반에서야 지금과 같은 한옥마을 개념을 갖고 정비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한옥마을에 핵심적 가로망인 태조로와 은행로를 중심으로 전통공예품전시관, 한옥체험관, 술박물관, 한방문화센터, 동락원, 최명희문학관 등 각종 문화시설이 들어섰다. 그리고 뒤이은 각종 문화예술인들의 전시공간과 활동공간의 확충은 한옥마을의 위상을 서울 인사동과는 격조가 다른 문화예술의 산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히, 중심길인 태조로가 2차선 차로로 형성된 것에 비해 은행로는 주민의 이해와 행정당국의 추진력으로 1차 차로만을 유지함으로써 한옥마을에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 되살아 나고 있다. 더구나 최근 정비된 은행로는 남천교를 새롭게 건축하면서 앞으로 한옥마을의 중심축이 될 예정이다. 이런 사정에 맞추어 은행로가 새롭게 살아나고 있어 주목된다.
즉, 매주 주말에는 한옥마을에 입주해 있는 각종 공방에서 자신들이 직접 만들고 있는 상품들을 들고 나와 많은 관광객들에게 홍보하고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서울 인사동의 거리상품이 어느 때부터인가 문화 정체성을을 알 수 없는 중국 및 동남아의 제품에 의해 잠식되는 것에 비해 한옥마을에 입주해 살고 있는 주민과 상점에서 자신들의 제품을 들고 나오고 있다는 점은 한옥마을의 갈길을 올바르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깊다고 생각된다.
또한 많은 관광객은 차가 다니지 않은 호젓한 은행로길을 거닐며 새롭게 들어선 찻집, 카페, 그리고 여러 공방들을 기웃거릴 수 있는 여유를 갖게되어 오랜만에 사람이 북적이는 분위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약간은 널찍한 공간인 한방문화센터 앞에서는 여러 장르의 음악을 마련하여 오가는 이들의 흥취를 돋아주는 모습이 보여 거리공연이 자연스럽게 자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올해안에 부체문화체험관, 소리문화체험관, 완판본문화체험관 등 다양한 문화시설이 자리잡게되면 그 내용과 문화적 독특성에서 어느 지역도 따라올 수 없는 자산과 틀을 갖추게 될것 같다. 그러나 하나 아쉬운 것은 한옥마을을 표방하면서 한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공간이 아직도 없다는 점이다. 현재 전주한옥은 단순한 숙박의 공간만으로 활용되고 있는 데 한옥에 대해 교육하고 직접 만들며 체험하는 공간과 프로그램이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타 시도에서 이미 비슷한 한옥숙박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어 전주의 차별화를 위한 보다 수준 높고 벤치마킹하기 어려운 프로그램의 마련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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