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건의 훈요십조 시비

손주항(전주대사습보존회 초대 이사장. 정치인)

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는 대광 박술희에 내린 유서로 가. 불교사상 강조 나. 풍수지리설 존중 다. 적자적손의 왕위계승 라. 당나라 풍속과 문물 숭상 마. 거란족 침입 방어와 강병책 바. 서경(평양)의 중요성 사. 간언직언의 경청 아. 차령(공주)이남 사람 관직참여 제한 자. 녹봉의 균등공정 차. 경사실록의 통치참조 등의 내용으로 전래된다.
이 중 차령이남 사람 관직참여 제한이 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동서 지역간 반목과 갈등으로 자리 잡고 있음은 민족의 비극이며 통분을 금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왕건의 의사와 상관없이 신라와 백제의 구원을 되살려 호남 죽이기 방편으로 후세 집권세력의 음모에 의한 일부 위작(僞作)으로 결론짓는다.
7세기 초, 신라가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치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를 김춘추 김유신이 이룬 통일 대업이라지만 우리 민족이 광대한 고구려 땅을 잃고 약소국으로 왜소해지게 한 치욕의 역사이고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김춘추는 신라와 백제 국경 대야성(경남 합천) 도독 품석의 부인인 자신의 딸 등 일족이 백제 윤충 장군과의 전투에서 죽은 데 대한 복수를 위해 당나라에 7형제 중 둘을 인질로 주고 나당 연합군을 편성하여 백제를 쳤다.
삼국사기는 나당연합군에 의한 백제 사찰 대관사 대 학살, 익산 땅 주민 집단 학살(大官寺 井水爲血 金馬郡地流血 廣五步)을 전하고 있고 거열성 등지서 백제인 2,700여 명을 살해했다(新羅本紀6 文武王 3年 2月條). 죽지 등에서도 9,000여 명의 주민을, 석성(충남 논산)에서 비무장 주민 5,300여 명을 도륙했다.
신라 경순왕의 후손인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백제인은 타락 부패했고 의자왕은 황음무도의 극치이며 삼천궁녀를 거느린 탕아로 과장되어 사실보다 부풀려 쓰였다.
왕건 훈요십조의 영향은 조선왕조에 계승되어져 팔도 사람들의 품성과 인심을 함경도 「이전투구(泥田鬪狗)」평안도「맹호출림(猛虎出林)」황해도「석전경우(石田耕牛)」경기도「경중미인(鏡中美人)」충청도「청풍명월(淸風明月)」경상도「태산교악(泰山喬嶽)」강원도「암하노불(岩下老佛)」전라도「풍전세류(風前細柳)」라 비유했다. 유독 호남 사람들을 지조가 없는 것 같이 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 호남을 저주하고 교활하고 간한 인심으로 도리가 불통하다고 썼다.
결국 위작 변조된 왕건의 훈요십조로 고려에 이어 조선 오백년을 거쳐 21세기 지금까지 호남은 배산 역수하고 간계에 능한 사람들로 살 곳이 못되는 땅으로 인식되어졌기에 동서 지역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반목하여 사갈시하는 이유가 됐다.
김성호교수(건국대)는 저서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에서 훈요십조는 헌종(1094~1095)때 거란군의 침입으로 개경(개성)의 궁궐과 고려정사 등 많은 사료들이 소실됐는데 100년이 지난 뒤 최황의 집에 보존돼 있었다니 의문이 있고 최황은 황룡사 중건을 맡았던 신라 중신의 후손이어서 훈요십조 중 호남 및 충청인 부분을 고쳐 ‘위작’했다고 단정했다.
고려사 전권을 탐독해도 왕건이 백제땅과 백제인을 혐오하며 배제한 내용은 없다. 국사 도선대사와 태사 최지몽은 전라도 영암, 왕비 장화홍씨는 나주, 문성황후는 순천, 결의형제 신숭겸은 곡성 태생이며 거란 침입 때 현종은 전주서 피난했다.
임진 정유왜란 때 김덕령 정충신 고경명 김천일 박광옥 등 호남 의병은 다른 지방보다 조직적이고 용감했으며 전과가 커 충무공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라 쓴 사실만으로도 호남인이 ‘풍전세류’라던가 ‘관재부적(官材不適)’ 운운은 만어(蠻語)고 음모인 것이다.
결론으로 왜곡 위작 변조된 사료로 인한 상호불신 지역감정은 민족의 비극으로 시비를 가려 교정돼야 하며 정견(正見) 정행(正行)해야 한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