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꽃을 바라보며

이원복(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봄꽃은 생명 약동의 불쏘시개입니다. 봄꽃들은 지고 있으나 하루가 다르게 싱그러운 초록색이 천하에 넓게 번집니다. 무채색에서 유채색으로 바뀌는 대자연(大自然)의 눈부신 변모를 바라보며 인간의 죽음도 마지막이 아닌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도 합니다. 올챙이에서 개구리로의 변모, 허물 벗는 매미 등이 시사하는 점이 있습니다. 액체가 기화(氣化)되었다 해서 없어진 것으로 볼 수 없듯 영생(永生)은 현 상태의 지속이 아닌 다른 형태로 옮겨가는 과정 전체를 아우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춘분 뒤 첫 번째 보름달을 보낸 후 첫 일요일이 부활절입니다. 이 날은 성탄절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아 올해는 4월 12일입니다. 만물이 되살아나는 화창한 봄날이니 대체로 3월 하순부터 4월 중순경이 됩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포함해 상당수 국민이 기독교인 우리나라에서 부활절은 믿는 이들만의 명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것’으로 흔히 생각하는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요소인데 단순한 육신의 소생(蘇生)이나 재생과는 구별되는 제 3의 달라진 상태를 지칭합니다.
우리들이 모태(母胎) 속에 있었을 때를 기억 못하듯, 사후(死後)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으나 그 존재의 가능성에 대해 어느 정도는 수긍되기도 합니다. 불교나 기독교와 달리 내세(來世)에 대한 신뢰 없이도 참으로 성실히 살며 인간을 아직 잘 모르는데 어찌 신(神)을 이야기 하며 삶을 모르는데 죽음을 이야기 하는가 한 공자(孔子, BC551- BC479)의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고백이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때론 시간이란 것과 더불어 우리들의 존재, 내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람이며 신비(神秘)의 영역으로 사료됩니다.
무슨 재미로 사시는지요? 다소 뜬금없고 생뚱한 물음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질문의 답을 헤아려보면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란 생각이 듭니다. 삶의 고귀함 내지 존재의 경이(驚異)와도 통하는 본질에 속하는 것이기에 선뜻 대답하긴 어려우나 재미와 삶 사이에는 분명한 함수관계가 있음을 시인하게 됩니다. 삶이 즐겁지 않으면 성공한 인생은 못되니 결국 기쁨이나 행복은 삶의 목표만이 아니라 의무라는 양면성을 지님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불행하다 느끼면 잘못 살고 있다는 것으로 결국 행복하기 위해 우리는 존재한다는 설득력을 지닙니다. 노동 아닌 놀이이며, 일이 생계수단을 넘어 아울러 자아실현 행위임을 간과해서는 아니 됩니다. 나름의 역할과 당위성이 있으니 이에 모든 이는 평등하며 너나없이 고귀한 존재들입니다.
구원(救援)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질병 등 고통에서 벗어남, 어둠에 빛, 절망에 희망, 슬픔에 기쁨 등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들 삶에 생기(生氣)를 주며 살맛을 부여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철따라 피어나는 화사한 꽃이나 명화(名畵) 등 아름다운 것들 앞에서도 그저 무덤덤한, 감정(感情)이 죽은 어둠의 심연에 빠진 이들은 어떻게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마음이 죽은 것보다 더 큰 슬픔은 없는 것이라 옛 사람들도 말하지 않았던가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라 했습니다. 설렘이나 심장의 고동을 동반한 가슴 떨림이 드문 삶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예술 창작의 모태며 조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해야 하며 할 수 있는 일, 따사로운 사랑, 미래에 대한 기대인 희망을 행복의 세 조건으로 열거함은 누구나 공감하게 됩니다.
대지는 몹시도 목마릅니다. 비가 귀해졌습니다. 기온이 급격히 오르며 풋풋한 새봄은 그냥 지는 꽃처럼 부서지나봅니다. 우후죽순(雨後竹筍)의 싱그러움이 그리워집니다. 오죽(烏竹)이 서울에선 좀처럼 보기 힘든 굵어진 통죽(筒竹) 형태로 바뀐 것을 보면서 전반적인 지구의 온난화(溫暖化)에 우리도 예외가 아님을 절감하게 됩니다. 꽃들은 순서를 어긴 양 다투어 피며 대지는 초록으로 물듭니다. 새봄의 감동을 충분히 만끽하기 전 어느새 무대에서 퇴장중이며 여름이 쑥쑥 자랍니다. 이에 나른함이 다가오며 매사가 시들해지기 쉬운 때가 되기도 합니다.
쇠퇴한 것이 다시 일어나는 것 또한 부활이니 오늘날 우리나라와 사회 그리고 개인 모두에게 절실합니다. 인간의 천재성이 깃든 그리스, 로마 미술에의 새로운 관심과 이들 음미(吟味)의 과정인 르네상스를 통해 문화혁신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무기력, 시큰둥함, 절망감, 타성으로부터 해방이기도 합니다. 해묵은 껍질을 벗고 어둠과 절망을 극복하는 적극적 행위입니다. 그야말로 법화경 구절처럼 ‘향기로운 바람이 때맞춰 불어와 온갖 마른 것 모두를 흩날리고 다시 비가 뿌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지치고 창의력의 고갈을 느낄 때 우리가 깃든 대자연은 문화의 보고(寶庫)인 박물관과 미술관, 도서관과 더불어 부활을 느끼고 체험하는 성스런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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