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악원이 달라졌어요!

윤중강 / 국악평론가, 목원대학교 겸임교수

‘한옥마을에서 레게음악을?’ 신문기사의 제목이다. ‘전주한옥마을에서는 국악만 들을 수 있다는 고정관념을 버려라.’ 이렇게 첫 줄이 시작됐다. 나처럼 국악분야에서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악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더욱 더 많이 알려지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적인 공간에서 국악을 들을 때의 감동은 묘하다. 국악의 끈끈한 생명력을 확인할 수도 있다. 또한 낯선 공간에서 나를 찾는다고나 할까? 국악에 대한 익숙한 관습을 뒤로 하면서 객관화시킬 수 있게 된다. 국악 자체가 갖고 있는 특징과 매력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요즘 우리 국악계를 보면 조금씩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모습이 보인다. 특히 국립국악원이 이런 변화의 흐름을 이끌기 시작했다. 분명 2009년의 국립국악원은 그간의 모습과 다르다.
국립국악원 앞뜰 잔디마당에서 외국 신차 발표회가 있었다. 특정TV의 특정기자는 부정적으로 접근했다. ‘있을 수 없는’ 걱정스러운 사건으로 생각했던 건, 내가 알기론 그 뉴스가 유일하다. 겉으로 보이는 현상만 보자면, 국립국악원과 외국자동차와는 연결고리가 없다. 그러나 오랜 전통을 강하게 지켜나는 것과 동시에 신중하게 변화를 시도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둘은 딱 일치한다.
서울남산국악당이 개관(2007년)했을 때, 프로그램북에 실린 내 글이 구설수가 된 적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전통음악을 하는 명인들을 어찌 명품브랜드와 비교할 수 있느냐고 비분강개하는 사람도 있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를 탄생시킨 주역들, 곧 손을 이용해서 피땀 어린 노력으로 명품을 만들어낸 장인정신은, 우리음악을 올곧게 잇고 있는 국악계 명인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가증 큰 문제는 고정된 이분법이다. 동양과 서양, 순수와 대중이라는 낡은 생각 때문이다.
숙명가야금연주단의 ‘비틀즈 메들리’는 가야금이란 악기 차원에서도 생각할 수 있지만, 비틀즈음악의 생명력으로 접근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피이니스트 조지 윈스턴이 연주한 ‘아리랑’은 피아노나 뉴에이지음악이 아닌, 아리랑의 가치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내친 김에, 나와 관련된 얘기를 하나 더 하기로 하자. 지난달 국립국악원에서는 “윤중강과 함께 하는 웰빙~웰씽!”이란 공연을 열렸다. 첫 번째 공연은 대체적으로 성공적이었고, 이제 11월에 두 번째 공연이 이어진다. 불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이런 공연은 불가능했을 거다.
국립국악원 공연에 웬 영어제목이냐고 비난할 사람도 있었을 거고, 과연 오후 2시에 국악공연에 누구 오겠느냐고 고개를 저을 사람도 있었을 거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지레짐작이 분명 기우였다. 관객들 중에서는 오히려 국립국악원의 공연제목으로는 오히려 신선한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국립국악원 예악당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오후 시간 때에 국악을 편하게 듣고자 하는 수효가 존재했던 거다. 틈새시장이 있는 것처럼, 틈새 시간과 틈새 장소가 있다. 국악은 이를 앞으로 효과적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사고의 전환’이 ‘국악의 돌파구’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대학의 입시나 교육은 갑갑하다. 국내의 일류 미술대학에선 입시방식이 진작에 바꿨다. 한 대학에선 이런 출제방식 자체를 ‘사고의 전환’이라고 한다. 과거 단순한 데생이나 색채구성 등 미술적인 기술을 위주로 보는 방식을 과감하게 버렸다. 이제는 사물을 바라보는 창의적인 시각을 더 우선시하게 되었다. 아직 국악과가 그런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음이 무척 안타깝다. 21세기의 인재가 갖추어야 할 가장 큰 덕목은 ‘창의성’이다. 이런 창의성은 기존의 타성적인 관습에서 벗어날 때 생겨난다. 국립국악원이 조금씩 구태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우리 국악계 모두가 그렇게 되길 희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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