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라산역에 한 번 다녀 오시길

대한민국학술원 사무국장 김은섭

신라 천년의 망국과 한반도 분단의 한(恨) 그리고 신라유민과 남북 천만 이산가족의 망향의 한이 함께 서려있는 곳, 남한의 최북단과 북한의 최남단이 만나는 곳, 녹슬고 일그러진 철마가 유라시아대륙으로 달리고 싶다고 절규하는 곳, 침묵 속에 개성공단의 근로자와 물자만이 무심히 드나드는 곳…. 그 곳 도라산역이 역사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기축년 한 해도 동짓달 긴긴 밤에 묻혀가고 있다.
 # 신라 경순왕 9년(935년) 10월, 신라의 마지막 군신회의(群臣會議)가 열렸다. 경순왕은 천년 사직을 지키지 아니하고 남에게 나라를 내 줄 수 없다는 마의태자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위태함이 경각에 달려있으나 우리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고, 죄 없는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게 할 수 없다”며 고려에 귀부(歸附)하기로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고, 태조 왕건에게 항복을 요청하였다. 왕건의 수락을 받은 경순왕은 그해 11월 동짓달 설한풍 속에 문무백관을 대동하고 경주를 떠나 송도에 다다랐다. 그리고 왕건의 딸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이하여 왕건의 부마(駙馬)가 되었다. 낙랑공주는 비운의 남편을 위해 산 중턱에 영수암(永守菴)을 지었고, 경순왕은 조석으로 산마루에 올라 신라를 향하여 애통함에 가슴을 찢었다. 이름마저 도라산(都羅山)으로 불러졌다. 그러나 경순왕은 사후에도 “왕의 운구는 송도 밖 100리를 넘지 못한다”는 고려 조정의 반대로, 끝내 임진강도 건너지 못한 채 고랑포에 묻히게 되었다.
 # 경의선(京義線). 일제 임시군용철도통감부에 의해 1904년2월 착공하고 1906년4월 개통하여, 경부선과 함께 한반도의 대동맥을 이룬 518.5㎞의 서울과 신의주간 철도. 6.25 동란과 더불어 수많은 피난민을 싣고 남으로, 남으로 향했던 그리고 1951년 6월 운행이 중단된 채 반세기 동안 끊어진 철도, 남북분단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단장의 철길. 6.15 남북공동성명으로 조성된 화해무드 속에서 2000년9월 복원공사를 착공하여 2002.2월 준공. 2002년 설날, 실로 52년 만에 임진강을 건너 도라산역까지 특별 망배열차 운행. 2003년 6월 군사분계선(MDL)에서 남북간 철도 연결…. 그러나 언젠가 기약도 없이 남북이 막힌 채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는 분단의 현장에서 철마는 오늘도 달리고 싶다고 울부짖고 있다.
 # 도라산역사(都羅山驛舍). 민간인 통제구역인 비무장지대(DMZ) 남방한계선으로부터 700m 남쪽에 위치한 남한의 최북단역. 서울로부터 북쪽으로 56㎞, 평양으로부터 남쪽으로 205㎞ 지점. 2002년2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부시 미국 전 대통령께서 방문하여 통일의 염원을 써놓으신 침목. 탑승객은 보이지 않고 덩그렇게 걸려있는 “타는 곳, 평양방면”의 안내판. 핀란드, 프랑스, 영국, 스페인과 포르투갈까지 갈 수 있는 유라시아 황단철도 4개 노선도(한국-시베리아횡단-러시아-유럽, 한국-만주-시베리아횡단-유럽, 한국-몽골-시베리아횡단-유럽, 한국-중국횡단-러시아-유럽). 그리고 “앞으로 한국철도(TKR)가 시베리아철도(TSR) 중국철도(TCR)와 연계되는 날, 도라산역은 대륙을 횡단하는 출발점으로 그 의미를 다시 부여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적힌 게시판…. 아! 언제나 그 날이 올는지?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신라의 천년사직을 버려야 했던 경순왕의 비애를, 셀 수도 없는 주검을 넘어 온 7천만 민족의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다시 오리라 믿고 보낸 임이 평생의 이별로 이어지는 이산가족의 아픔을, 역사는 아는지 모르는지, 한 서린 도라산역에는 메마른 갈대 잎에 삭풍만 일고, 무심한 철새만 오가고 있다. 도라산역을 이산가족이 고향으로 ‘도라’가는 역으로 만들 수는 없을까? 우리는 언제쯤이나 이 역사의 질곡에서 벗어나, 통일된 조국에서 도라산역을 ‘고향으로 ‘도라’가는 역’으로 만들어 자유로이 남북을 오가며, 대륙간 횡단기차를 타고 멀리 유라시아를 갈 수 있을까? 내년 봄 해빙이 되고 꽃이 피면, 꼭 도라산역을 방문해 볼 일이다. 세밑에서 “평양과 신의주를 가실 승객께서는 1번 홈에서, 모스크바와 파리행 승객께서는 3번, 베이징과 리스본행 승객께서는 5번 홈에서 승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역무원의 구내방송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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