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년 만에 고향으로 귀농한 최근우(60)씨.
◇다시 돌아온 고향
살다보니 지치고, 쓰러지고.
힘들었다.
상처로 아픈 나를 “아프지 말라”며 가슴 깊이 포근하게 안아준 그 곳.
43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나를 그렇게 보듬었다.
고향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나를 믿어 줬고, 또 희망도 줬다.
사업에 실패하고 다시 고향에 돌아 온지 3년째다.
귀농하자마자 심은 사과나무가 지금은 나의 희망이다.
지난해까지는 거름 값과 관리비 등으로 돈만 투자됐지만, 올해부터는 생산량이 늘어나게 된다.
또 내년부터는 본격적인 수확기에 접어든다.
적잖은 수입이 생길 것 같다.
나 하나만 믿고 돈을 빌려준 친척들이 고맙다.
서울에서 딸과 살고 있는 아내도 곧 시골에 내려와 함께 살기로 했다.
빨리 아내가 왔으면 좋겠다.
설 명절에는 오랜만에 동생 부부도 왔다.
형이 살아가는 모습에 가슴 아팠겠지만, 행복해 하는 나의 모습에 안심하는 모습이다.
내가 꿈꾸며 살 수 있는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새로운 출발
고향인 진안군 백운면 두암마을에 다시 내려온 것은 지난 2008년.
지난 1965년 16살에 고향을 떠났으니 43년만이다.
그때는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어려웠다.
“돈을 벌어야 된다”는 생각 하나만 갖고 상경했다.
서울에서 처음 배운 것은 이용기술.
잡일부터 시작해 자립할 때 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고생해 배운 이 기술 하나로 가정도 꾸리고, 아들과 딸을 키웠다.
먹고 살만해 친구와 후배들이 함께 모여 향우회도 만들었다.
8년 동안 향우회 회장을 맡았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새롭게 시작한 건축업이 실패해 그동안 모아 뒀던 재산을 모두 날렸다.
생활이 어려워지게 된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고향인 두암마을로 내려와 새 출발을 하기로 결심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 던 곳.
친척들과 친구들이 살고 있는 그 곳에서.
가족들을 뒤로 하고 혼자 먼저 내려왔다.
처음 사과나무를 심었다.
4,000여 평에 심은 사과나무가 1,200주다.
몸은 힘들었지만 희망이 나를 채찍질했다.
지난해 처음 수확한 사과는 친척들과 친구들에게 ‘맛보기’로 선물했다.
460m 고랭지에서 자란 사과여서 그런지 “맛이 너무 좋다”는 칭찬들에 기분이 좋다.
올해부터는 더 많이 수확할 수 있다.
마음이 든든하다.

◇두암마을 이장님
올해부터 마을 이장이다.
어르신들이 추천해 줬다.
서울에서 향우회 회장을 할 때 마을회관 건립에 도움을 줬는데, 그 마을회관이 내 본부가 될 줄이야.
150여명 되던 마을주민이 이제는 40여명 밖에 되지 않는다.
이장은 마을을 위한 일에 앞장서야 하는 중책인데, 잘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마을이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역할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어르신들을 공경하고 우리 마을이 발전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해야겠다.
백운면 귀농인들의 모임에서도 회장을 맡았다.
귀농인이 70여명쯤 되는데, 모임에 30여명밖에 나오지 않는다.
와서 보니 귀농인들이 기존 주민들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 귀농한 경우는 적응이 쉽지만, 고향이 아닌 경우는 참 힘들 것 같다.
이들의 어려움도 살피면서 시골에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색소폰 불면서 농촌 생활 즐기는 채기묵씨
◇귀농
“요즘 아내는 사진에 푹 빠져 있습니다. 시골 생활에 취미를 붙여 아주 좋아해요”
지난 2005년 충남 아산에서 주유소와 휴게소를 모두 정리하고 진안군 동향면으로 귀농한 채기묵(65)씨.
낯선 곳에 처음 발을 내딛을 때만 해도 막막했는데, 이제는 농촌 사람이 다됐다.
대전이 고향인 채기묵(65)씨는 “노후를 보람되게 보내기 위해 귀농을 하게 됐다”면서 “이제는 이곳이 고향이다”고 말한다.
채씨가 처음 귀농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TV에서 노인들의 모습을 본 이후다.
도시의 노인들이 갈 곳이 없어 방황하고, 몇 천원을 받기 위해 새벽에 교회에 몰려다니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채씨는 “TV를 보면서 나는 노인이 돼서 저렇게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면서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농촌에서 정착하려고 마음먹게 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동갑내기 아내 유문희씨와 의견차이가 생겼다.
채씨는 계곡에 물이 흐르고, 사람이 없는 산속에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 유씨는 “그런 곳에서는 무서워 살 수 없다”면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자”고 반대했다.
그래서 결정한 곳이 신송리 호천마을이었다.
새로 지은 채씨의 집에서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난달 딸과 사위도 이곳으로 귀농을 해 적적하지도 않다.
94세의 노모와 아내, 유학에서 3년 만에 돌아온 사랑스런 막내딸까지 식구가 많아졌다.
거실에 놓여있는 훈훈한 벽난로처럼 가족 모두가 행복한 표정이다.

◇농촌에서 뭐해요?
채씨가 처음 귀농해서 시작한 일은 자두 농장을 만드는 일이었다.
집 바로 아래에 있는 산을 개간해 밭으로 만들었다.
그곳에 자두나무를 식재한지 3년째 됐다.
채씨는 “산을 개간해 자두 농장으로 만들었는데, 정말 힘들었다”면서 “돈을 많이 벌겠다는 욕심보다는 생활비만 번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고 밝혔다.
올해부터는 자두가 본격적으로 생산돼 짭짭한 소득도 올릴 수 있게 됐다고.
이어 채씨는 “올해부터는 사위가 함께 일을 할 수 있어 힘을 덜게 됐다”면서 “사위가 이곳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 줄 생각이다”고 말했다.
자두농장에서 일하는 것 빼고 채씨가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색소폰이다.
귀농하기 2년 전인 지난 2003년 처음 배운 알토 색소폰이 이제는 가장 가까운 친구다.
지난해에는 색소폰을 통해 알게 된 지인들을 집으로 초청해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부인은 글쓰기와 사진, 동영상 찍기에 바쁘다.
개인 블러그(다음카페-날개달린 사진사)를 운영하면서 틈틈이 찍은 사진을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있다.
유문희씨는 “요즘은 동영상 찍는 것에 재미를 붙였다”면서 “취미를 갖게 된 이후 시골 생활의 재미에 흠뻑 빠져 있다”고 자랑했다.

◇귀농인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말
귀농인들이 현지 주민들과 화합하지 못해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
채씨는 “모든 사회가 자기하기 나름이다”면서 “귀농인들이 처음 시골 생활을 할 때 버려야 할 것이 부와 명예, 학력 등이다”고 말했다.
그는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농민들에게 배워야 한다”면서 “주민들과 같이 동화될 수 있도록 마을일에도 앞장서야 한다”고 권고했다.
채씨는 “처음 이 곳에 정착할 때 주민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면서 “시간이 흐르면서 주민들도 내 마음을 알아주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채씨는 “귀농인들이 농촌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3~4년이 고비다”면서 모두 버리고 배우는 자세로 주민들과 생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채씨는 일부 귀농인들이 행정의 지원과 보조에 의존하려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채씨는 “농촌에서 생활하려면 내 땀으로 일궈 보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면서 “자립정신과 개척정신이 없으면 귀농에 실패하게 된다”고 충고했다./진안=김동규기자·kdg2066@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