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이하여. . .

어언 10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리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26일 9시15분경 하얼빈 역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동양평화의 교란자 이토 히로부미를 여섯 발의 총탄을 발사하여 그 중 세발을 적중시켜 저격하고 중국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뤼순 감옥에 1909년 11월3일 연루자 일행과 함께 수감되어, 다음날부터 12월21일까지 4차례에 걸쳐 미조부치 감찰관의 신문을 받았으며, 조선통감부에서 파견한 사카이경시에게 1909년11월26일부터 1910년 2월6일까지 12차례 이상의 신문을 받고 1910년 3월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신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최근 어느 중학생이 “안중근 의사가 안과의사냐?”고 물었다는 얘기가 있고, 안중근과 안창호를 잘 분별하지 못하는 고등학생도 있다고 들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안중근 의사가 이등방문을 저격으로만 알고 있는지. 단순히 일본이란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만이 가슴에 새겨진 건 아닐까. 대부분 국민은 저격 100주년인지 순국 100주년인지 조차 모르고 있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갖가지 행사들, 대한국인 손도장 찍기, 기념관 개관, 사진전, 자체적으로 펼치는 계기행사들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는데.....
영·정조 이래 조선은 노론세력이 집권하면서 그나마 좁디좁은 땅의 여러 지역을 배척하고 외척일족의 세도정치를 자행하면서 부패와 매관매직으로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가는 가운데 동학농민혁명으로 1894년 4월 조선정부의 요청으로 청군이 조선에 진주하면서, 일본군도 함께 들어와 수십 만 명의 동학농민군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폐정개혁”과 “척왜척양”의 기치를 내걸었던 동학농민혁명이 엉뚱하게도 외군 특히 일본군의 진주를 가져오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한 한 장면이 아닐까. 단발령과 조선 군대의 해산 등 이런 과정에서 안중근은 일본의 노골적인 국권침탈과 일본인들의 잔악무도한 행동에서 심한 모멸감과 일제에 대한 저항심, 민족의식이 싹트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의협심과 무용력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갑오의려”의 과정을 통해 가일층 늠름한 모습으로 민중에게 다가섰던 분이며, 서양 문물인 서학을 통해서 개화사상과 민족의식에 더욱 매진했던 것도 대대로 내려온 가풍이라 아니할 수 없다. 후에 거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흔들리지 않는 곧은 심지가 어머니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며 일제에 목숨을 구애하지 않는 순국의 선택에도 영향을 준 것이다.
한 예로 『중근은 큰일을 했다. 만인을 죽인 원수를 갚고 의(義)를 세웠으니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인가. 큰일을 하였으니 목숨을 아끼지 말라. 일본 사람이 너를 살려 줄 까닭이 없으니 비겁하게 항소(抗訴)같은 것은 하지 말라. 깨끗이 죽음을 택한 것이 이 어미의 희망이다』라는 간절한 전언(傳言)도 작용했다고 한다.
또한 사회적으로 이미 부패한 상황에서도 오직 하나 누대에 이어받은 가산을 정리하여 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에 투자하여 구국영재 교육기관으로 신식 군사훈련과 자주독립국가가 되기 위해 서양 나라를 알아야 한다는 배움을 최우선으로 가르쳤던 교육자인 동시 사회 계몽운동을 펼친 사람이 아니었던가.
한편 안중근 의사는 사형 날짜를 받고 며칠 남지 않은 생의 마지막 날들을 한국과 중국과 일본이 양육강식을 넘어 공동번영을 모색하는 길을 추구하는 저술에 쏟아 부었던 사람으로 미완성 원고인 '동양평화론'을 통해 "대저 합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의 이치"라고 전제한 뒤 19세기 이후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동아시아를 지키려면 한·중·일 3국이 힘을 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안중근 의사는 뤼순에 한·중·일 3국이 참여하는 동양평화회의를 설치할 것, 3국 공동 은행을 만들어 공용 화폐를 발행할 것, 3국의 젊은이로 공동 군대를 편성하고 상대방의 언어를 가르칠 것, 한국과 청나라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앞서 있던 일본의 지도 아래 상공업 발전을 꾀할 것 등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동양의 평화론 자였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여, 마음 같이 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라고 했다. 아직도 찾지 못해 구천에 떠돌고 있는 안 의사의 유해 존재를 일본은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순국 전 손수 수놓은 한복을 입고 있던 안중근 의사의 늠름한 모습을 그려본다.
그의 짧디 짧은 32세의 행동은 한 낯 일개인이지만 그 모습은 오늘날 우리 팔천만 동포의 가슴깊이 새겨야 할 것이고 100년이 지나가고 있지만 앞으로 천년이상 우리민족 역사에 영원히 살아 숨 실 것이다. 또한 우리 국민은 개인 영달 이전에 오늘을 존재하게 한 많은 민족의 열사와 의사에 대한 고마움을 갖고 자신의 자존심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면 안중근 의사가 바라는 세계속의 대한국이 되지 않을까 한다.

2010.3.23.
국립임실호국원장 김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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