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미 - 금산사 미륵전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하늘과 땅이 맞닿는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김제시는 국내 최고의 곡창으로 손꼽힌다. 망망한 금만평야의 동쪽에 우뚝 솟은 모악산은 해발 793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일찍이 ‘호남의 명산’이라 불리며 신성시돼 왔다.
모악산은 ‘큰 뫼’라는 뜻의 ‘엄뫼’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며, 호남평야의 젖줄인 만경강과 동진강의 발원지다. 특히 만경강?동진강 사이를 흐르는 두월천과 원평천은 백제시대 축조된 동양 최대의 수리시설인 벽골제의 원류이다.
모악산은 금산사와 귀신사 등 여러 절을 거느리고 있으며, 증산교를 비롯한 여러 신흥종교의 집회소가 밀집해 계룡산과 함께 토착종교집단의 성지로 불리고 있을 정도로 신앙적 유래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1,400여년 역사의 금산사
금산사는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이다.
백제 법왕 원년인 서기 599년, 임금의 복을 빌기 위한 ‘자복사찰’로 창건됐다. 창건 당시에는 소규모 사찰이었으나 766년 진표율사가 중창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륵도량의 거찰로 면모를 갖추었다.
이때 진표율사는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여 미륵전에 모셨고, 금당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자기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그 이래로 금산사는 미륵신앙, 즉 신라 오교의 하나인 법상종의 근본도량으로서 이 지역 불교문화의 중심지가 됐다. 때문에 금산사에는 대웅전이 없고, 대신 미륵전에 있는 미륵불이 주불이 됐다.
935년에는 후백제 견훤왕이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다가 맏아들인 신검과 양검, 용검 등 아들들에게 붙잡혀 유폐를 당한 곳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는 문종 33년(1079)에 주지로 부임한 혜덕왕사가 다시 절을 중수하여 88당711칸의 대찰을 만들고 금산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하지만 혜덕왕사때 세워진 건물들은 선조 31년(1598년) 정유재란 때 금강문 하나를 빼 놓고 모조리 불에 타고 말았다.
이는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 사명당과 함께 구국 3화상의 한 분인 뇌묵당 처영대사가 금산사를 중심으로 승병을 일으켜 활동한 것에 대한 왜군들의 보복 때문이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선조 34년 수문대사가 금산사 재건을 시작해 인조 13년(1635년)에 완성한 후 부분적인 중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건축사의 위대한 업적 미륵전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은 신라 법상종시대에 미륵본존(彌勒本尊)을 봉안한 불전으로, 속리산 법주사의 팔상전과 함께 한국 불교건축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꼽힌다.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불국토인 용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상징한다.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사찰 속에 응축시켜 먼 미래의 새로운 부처 세계에서 함께 성불하자는 것을 다짐하는 참회와 발원의 장소인 것이다.
미륵전은 신라 경덕왕 21년(762)부터 혜공왕 2년(766) 사이에 진표율사가 가람을 중창하면서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았던 체험 그대로를 가람에 적용하여 세웠다. 안에는 미륵장륙상을 본존으로 모셨으며 남쪽 벽에 미륵과 지장보살에게서 계를 받는 광경을 벽화로 조성하였다.
현재도 소조불상(塑造佛像)의 대좌 아래에 커다란 철제 수미좌(須彌座)가 남아 있어 과거의 장육상대좌임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의 불상은 1597년 정유재란 때 건물과 함께 소실됐으며, 1627년(인조 5년) 소조삼존상이 새로 조성됐다.
현 건물은 1601년부터 1635년 사이에 수문대사에 의해 재건된 뒤, 4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 옆면 4칸이고, 3층은 앞면 3칸, 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지붕 네 모서리 끝에는 층마다 모두 얇은 기둥(활주)이 지붕 무게를 받치고 있다.
건물 안쪽은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며, 제일 높은 기둥을 하나의 통나무가 아닌 몇 개를 이어서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건물 전체의 높이는 18.91m, 측면 길이는 15.45m에 달하며, 하부의 규모에 비해 위로 올라가면서 급격히 체감이 이뤄져 안정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미륵전은 용화전, 산호전(山呼殿), 장륙전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을 지녔다. 지금도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之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 등의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있다.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가 미륵불의 세계를 나타낸다.
미륵전의 내벽과 외벽에는 사이사이에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보살과 신장, 그리고 수도하는 모습 등 다양한 벽화는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미륵전 본존불 동양 최대
미륵전에 모셔진 삼존불 가운데 본존은 높이가 11.82m로, 옥내에 있는 입불로는 동양 최대 규모다. 좌우에는 높이 8.79m에 달하는 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진표율사가 미륵전을 조성할 당시에는 3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륵장륙상 한 분만이 모셔졌다. 그 뒤 조선시대에 수문대사가 다시 복원하면서 소조 삼존불로 봉안했는데, 1934년에 실화로 일부가 소실되었다. 4년만인 1938년 우리나라 근대 조각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김복진(1901~1940)이 석고에 도금한 불상을 다시 조성해 오늘날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미륵본존은 거대한 입상이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불단 아래의 거대한 청동대좌는 정확한 조성시기를 알 수 없지만 잦은 소실과 복원의 과정에서도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는 그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불상을 받들고 있는 역사의 대변자가 되는 셈이다.
본존불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고, 왼손 역시 손가락을 조금 오므렸지만 밖을 보이게 한 시무외인이다. 대개 미륵불은 다른 불상과 구별되는 별개의 특징을 지니지 않는다.
본존불 양 옆의 협시보살은 왼쪽이 법화림(法花林) 보살이고, 오른쪽이 대묘상(大妙相) 보살이다.
미래의 부처, 아직 오지 않았으나 반드시 와야 할 부처인 미륵불을 기구하는 미륵신앙은 미래에 대한 희망의 신앙으로서 현세에서 복을 누리지 못하고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민초들 사이에 널리 퍼져 왔다. 특히 정치적 사회적 변혁기에는 민중의 소박하고 간절한 소망의 귀의처가 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중속에 뿌리박고 있다.
/소문관기자?mk7962@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