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미 - 완주 송광사

완주군 소양면 종남산 자락에 위치한 송광사는 신라 경문왕 7년(867) 구산선문 중 도의국사의 가지산파 제3조인 보조국사 체징(804~880)에 의해 개창된 절이다. 하지만 그보다 284년이나 앞선 신라 진평왕 5년(583)에 도의선사가 절터를 잡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폐사가 되어 주춧돌만 가시덤불 속에 남아 있던 것을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이곳을 지나다 길지임을 알아보고 표시를 해두었고, 순천 송광사를 개창한 후 제자들에게 완주 송광사를 복원·중창할 것을 부탁했다. 이후 다시 수백 년이 지난 조선 광해군 15년(1622)에 웅호, 숭명, 운정, 득신, 홍신 등 보조국사 제자들이 덕림스님을 중창주로 모시고 복원‧중창했다.
개창 비문에 의하면 송광사의 중흥에는 당시의 지방관 및 왕실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대웅전 불단에서 발견된 목패 등에서는 왕실의 안위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무사히 돌아올 것을 기원하고,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으로 말미암은 어려운 시국을 불법으로 극복하고자 한 흔적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다.
특히 병자호란 때는 전주사고(왕조실록)를 지키기 위해 승군 700명이 머무르는 등 민족의 역사적 영욕을 함께했던 호국도량이기도 하다.
‘석가의 화현’이라던 진묵스님과의 일화도 전한다. 1623년 대웅전 삼존불 조성시 진묵스님이 증명법사로 초청되었으나 부여 무량사에서도 동시에 초청을 받았다. 스님은 송광사에는 주장자를 보내고, 무량사에는 단주를 보내 법력을 나투었는데 주장자가 밤낮으로 꼿꼿이 서서 법상을 물리는 이적을 나타내기도 했다고 전한다.
한때 ‘백련사(白蓮寺)’라 불리기도 했으며, 800동의 당우와 600명의 승려들이 기거해 16방사에 16방주(주지)가 있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만하다.
종남산과 위봉산을 배경으로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송광사는 기도 도량이라는 점 외에도 절을 휘감아도는 듯한 시냇물과 입구 10여리에 이르는 벚꽃, 산사 체험을 위한 템플스테이 등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다.
송광사는 규모와 역사성에 걸맞게 4점의 보물을 비롯해 10여점의 문화재들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진입로를 거쳐 송광사에 들어서면 주변 경관만큼이나 아름다운 송광사의 모습들이 차례로 펼쳐진다. 커다란 소조(塑造) 부처상과 대웅전 천정의 비천상, 나한전에 모셔진 오백의 나한전, 그리고 국내 사찰 중에 유일하게 십자각으로 조형된 종각, 사천왕전 등이 그것이다.

보물 제1243호 송광사 대웅전
송광사 대웅전은 조선 인조 14년(1636)에 벽암국사가 짓고, 철종 8년(1857)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현판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인 의창군 이광이 쓴 것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운 송광사 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다.
대웅전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아미타여래, 왼쪽에 약사여래를 각각 소조로 조성했다. 불상의 높이는 5m로, 전각안에 모셔진 부처상 가운데는 무량사 소조 아미타불상(5.4m)과 함께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다.
장중하고 원만한 얼굴과 두껍게 처리한 옷은 당당한 불상양식에 걸맞는 표현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 표현은 강한 인상을 나타내주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서부터 나타나는 양식이다. 본존불에서는 1993년 삼불의 조성기와 ‘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 후령통 등 여러 점의 복장유물이 발견됐다.
이 조성기에 따르면 숭정 14년(인조 5년.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극복의 의지와 역사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고, 역사의식이 발현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런 연유로 복장유물과 함께 보물 1274호로 지정돼 있다.

국내 유일한 십(十)자형 종루
송광사 종루는 조선시대의 유일한 십(十)자형 2층 누각으로 송광사 도량을 상징하고 있다. 종루나 종각이 보통 사각형인 것과는 달리 이 종각은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이나 궁궐에서만 사용하는 십(十)자형 지붕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종루 중앙칸에 범종을 두고, 동‧남‧서 3칸에 목어와 운판, 법고를 설치했다. 종루의 지붕은 중앙에서 모아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마루 밑의 기둥들은 모두 원형기둥을 세워놓았다.
범종은 숙종 42년(1716)에 조성됐는데, 종의 고리에는 용이 여의주를 왼손에 쥐고 있고, 용의 뒤에 소리 울림을 도와주는 음통이 있다. 종 윗부분에는 꽃잎 무늬로 띠를 두르고, 아래 구슬 모양의 돌기가 한 줄 돌려 있다. 그 밑으로는 8개의 원을 양각하여 그 안에 범자로 ‘진언 옴마니반메홈’을 새겼다.
크기는 높이 107cm, 입 지름 73cm이고, 광주 무등산 중심사에서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종루는 보물 제1244호, 범종은 유형문화재 138호로 각각 지정돼 있다.

‘호국의 의미’ 신앙 ‘사천왕전(殿)’
송광사는 특이하게 4천왕이 있는 곳을 ‘천왕문’이라 하지 않고, ‘천왕전’으로 건축해 여닫는 문을 설치했다. 호국의 의미를 부여한 신앙이라는 점에서 ‘문(門)’이라 하지 않고 ‘전(殿)’이라 한 것이다.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한 채 동‧서‧남‧북의 사천국을 다스리는데, 조선시대에는 통상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두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상 왼쪽 머리끝 뒷면에는 조선 인조 27년(1649)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는 글이 있으며, 왼손에 얹어놓은 보탑 밑면에는 정조 10년(1786)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병자호란 이후 국난극복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천왕상이 지녀야할 분노상, 용맹상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주문‧나한전 등 문화재 즐비
송광사의 입구에서 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는 상징물인 일주문(유형문화재 4호)은 조선시대에 지은 것이다.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인데, 절의 영역이 작아져서 순조 14년(1814)에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다가 1944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졌다. 일주문의 이동은 시대별로 나타난 불교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건물 자체로는 안정적인 균형감과 단정함이 돋보인다는 평가다.
유형문화재 5호 송광사 개창비는 절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다.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리고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의 앞면에는 비 이름과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보조국사 지눌이 종남산을 지나다가 절터를 잡아놓고 제자들에게 절을 지을 것을 당부하였다는 내용과 보조국사에서 벽암대사에 이르는 스승과 제자의 계보가 주된 내용이다.
조선 인조 14년(1636)에 세운 비로 신익성이 비문을 짓고, 의창군이 글씨를 썼다.
나한전은 석가모니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으로, 송광사에서는 나한기도를 봉행한다. 나한기도를 정성으로 수행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뤄진다고 전해질 정도로 영험하다. 나한전 내부에는 석가여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16나한과 오백나한, 인왕상, 동자상, 사자상 등을 모셨다.
또 부도전은 대웅전 뒤쪽의 부도밭에 위치해 있는데 10여개의 부도들이 모셔져 있다. 그 중 하나는 송광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승병장으로 유명했던 벽암당 각성대사의 사리가 안치된 것으로 전한다. 지방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돼 있다.
이밖에도 지장전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금강문, 목패 등이 각각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소문관기자?mk7962@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