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달과 해가 합해져 있는 것 같이 물의 맑기가 깨끗하다’
선유도 북쭉 고군산군도의 한 섬인 명도(明島)는 바다 뿐 아니라 섬 내부도 조용하다. 한 낮에도 파도소리와 새 소리만 간혹 들린다는 조용한 섬. 명도로 가기 위해 여행 짐을 꾸렸다.

명도로 데려다 줄 여객선은 장자훼리호. 오전 11시 군산여객터미널에서 여객선에 올랐다. 세월호 참사 이후 깐깐해진 승선 절차에 따라 신분증을 일일이 확인한다. 물때에 맞춰 매일 2번씩 운항하던 것이 이날부터 3일간은 하루에 1번만 운항한다.
선원들이 운영하는 선내 매점에서 구입한 컵라면과 새우깡이 2시간 가까운 뱃길을 동행했다.
명도항 방파제에 내려서 예약한 숙소로 향한다. 명도항 방파제 한편에는 손질을 위해 뭍으로 올라 온 어선과 그물들이 널려있다. 주민들이 도리깨로 그물을 연신 내려친다.
“삼각망 그물이에요. 그물은 항상 물 속에 들어가 있어 해초들이 잘 달라붙어요. 바다에서 꺼낸 그물은 말려서 이렇게 해초를 털어내는 거예요. 이 그물을 바다에 넣으면서 바다에 있던 그물을 꺼내 또 청소를 하는 거지요”
명도에서 자란 박길명(53)씨는 겨울에는 김 양식과 자연산 홍합을 채취하다가 봄이 되면 어선을 타고 고기를 잡는다. 이날은 어선도 방파제로 들어올렸다. 배 바닥에 달라붙은 작은 조개 등 이물질을 떼어내고 간단한 보수가 필요한 부분은 직접 손을 본다. 농촌과 마찬가지로 사용하는 공구나 기계를 직접 손보는 기술은 섬 생활의 기본이다.
명도는 고군산군도 16개 유인도 가운데 하나다. 바다낚시로 유명한 방축도와 고군산군도 끝 섬인 말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섬 크기도 말도에 비해 작고 사는 주민도 숫자도 적은 명도는 다른 섬들에 비해 이름이 덜 알려져 있다. 야박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평범한 섬이란 얘기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명도는 매력이 있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지역에서는 누릴 수 없는 호사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힐링이다. 요란함 대신 하루종일 인기척도 거의 없는 조용함. 아침이면 섬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포장도로를 천천히 걸으며 온 몸에 싱그러운 바다내음을 받을 수 있다. 도로 옆에는 바닷바람을 받으면서 꿋꿋하게 자란 키 높은 해송이 나란히 같이 한다.
방파제를 벗어나면 작은 마을이다. 10여 가구가 생활하고 있지만 일부는 겨울철에 육지에서 생활하기도 한다. 마을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교회가 있다. 목사 부부가 생활하는 교회로 신도 숫자에 구애 받지 않은 청빈한 교회라는 귀뜸이다. 마을 길 언덕에 올라서면 오른쪽에 지하수 시설이 보인다. 명도주민의 식수가 이 시설을 통해 공급된다.
이 곳을 조금 지나면 폐교가 나온다. 선유도초등학교 명도분교다. 1964년 9월 문을 연 이 학교는 지난 1992년 2월 문을 닫았다. 약 28년 동안 40명을 졸업시킨 초미니 학교였지만 지난 1971년에는 졸업생이 9명이나 됐다고 한다. 총각 선생님의 손때가 남아 있을 것 같은 숙직실과 교실 건물은 폐허로 남았지만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라는 책읽는 소녀의 동상은 색깔만 바랬을 뿐 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인물은 사라진 이승복 동상 기단을 지나 조금 더 가면 갈림길이다. 오른쪽은 주민들이 오진녁이라 부르는 곳으로 이어진다. 왼쪽으로 길을 잡아 가다보면 길 아래 오른쪽 경사에 제법 넓은 터가 나온다. 이 곳이 1969년 발생한 십이동파도 간첩 사건 이후 사라진 ‘허지박굴’ 마을이 있던 곳이다. 명도 북쪽으로 변변한 배 접안시설조차 없던 곳이지만 당시 작은 마을이 있었다.
허지박굴이 고향인 안영철(54)이장은 “당시 우리가 살던 마을에는 모두 8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중학교 때 현재 자리로 이사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사 온 집은 방 2칸 부엌 1칸인 9평짜리 일명 ‘새마을주택’ 이었다. 정부에서 십이동파도 간첩사건 이후 강제 이주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때 기억을 되살렸다.
십이동파도 간첩 사건은 1969년 4월 19일 간첩 3명이 십이동파도 주민 2명을 북으로 납치해 간 사건을 말한다.
윤연수 고군산군도 문화해설사는 십이동파도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당시 십이동파도에는 3가구가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흑염소를 섬에 방목해 키우고 있었는데 사건이 난 당시에는 2가구는 육지로 나와 있던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섬에는 한 가족 3명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2명이 간첩에 의헤 북한으로 납치됐다. 납치를 모면한 한 사람은 집 마루 밑에 숨어 있다가 들켰지만 벙어리 흉내를 내서 화를 면했다고 한다.”
허지박굴을 지나쳐 좀 더 걸으면 정자가 있고 이곳에서 서면 보농도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보농도는 무인도로 말도 사이에 있다. 바닷물 흐름이 섬과 섬사이 갑자기 좁아진 곳을 만나 사납다. 일부러 엔진을 끈 유람선이 사나운 물길을 따라 흘러가는 모습이 맘을 졸이게 만든다.
온 길을 되짚어 명도분교 갈림을 지나치면 곧이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부안 격포 수성당을 닮은 지역이 나온다. 옛날 주민들은 아주 가파른 이길을 따라 해산물을 채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계속 길을 가다보면 시야가 확 트인다. 바로 오진녁이다. 주민들은 오진녁이라고 하고 낚시 마니아들은 칼여, 어진여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가마우지의 배설물로 물들인 하얀 머리를 항상 들어낸 오진녁에는 해삼, 낚지 등 귀중한 해산물을 심심치 않게 얻을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물 때에 따라서는 빈 손도 감수해야 한다. 되돌아 나와 이전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방치된 헬기장을 지나 방축도가 한 눈에 보이는 섬 동쪽 끝에 도착한다.
이렇듯 명도의 능선을 이어준 길을 한바퀴 걷는 시간은 한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몇 군데 벤치도 놓여있어 잠깐 쉴 수도 있다.
산책과 함께 싱싱한 자연산 해산물을 맘껏 즐길 수 있다는 것도 명도 여행의 재미다.
섬에 왔으니 낚시도 빠질 수 없다. 숙소로 돌아와 준비해 간 낚시대를 챙겼다. 방파제에서 낚시를 던져 보지만 부실한 미끼와 날씨 탓인지 별 재미가 없다.
주민들은 5월부터 10월까지를 낚시 절정기로 본다. 감성돔, 농어, 우럭, 놀래미 등 다양한 어종이 있다. 5월이 되면 물고기를 발로 차고 다닌다는 농담을 던지는 주민도 있다.
안영철 이장은 섬을 찾는 사람들은 낚시배를 이용해 선상 낚시를 하거나 한 통의 그물을 예약해 걸린 물고기를 모두 가져가는 방식으로 해산물을 즐긴다고 전한다.
어둠이 섬에 내려 앉으니 그나마 들리던 소음도 이제 거의 들리지 않는다. 간혹 밤 길 산책을 나선 관광객들의 발걸음에 놀란 이곳 명도 견(犬)의 대답만 들려올 뿐이다.
/이병재기자·kanadasa@

▲명도 정보
군산여객터미널에서 장자훼리호를 타면 된다. 요금은 15,050원. 운항시간은 대략 1시간 40분 정도,
장자도와 관리도를 거쳐 방축도 명도 말도까지 운항하며 회항 때는 말도에서 명도를 거치지 않고 관리도, 장자도만 거쳐 군산항으로 들어온다.
명도에서는 주민들이 운영하는 민박집에서 숙박할 수 있으며 선상낚시 등도 같이 즐길 수 있다. 연락처 010-6388-0437, 010-5434-7053.

▲박길명씨의 어린 시절
명도에 전기가 들어온 것은 1980년이지. 전기발전기가 들어왔으니까. 그 전까지는 전기 대신 선박용 배터리를 연결해 텔레비전을 시청했지. 초등학교 2학년때 쯤 명도에 첫 텔레비전이 들어 온 곳 같아. 그 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봤지.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바로 프로 레슬링. 인기가 참 대단했지. 레슬링을 보다가 김일 박치기가 나오면 모두가 박수를 치고 좋아했어.
또 학교가 끝나면 방파제에서 낚시를 많이 했지.
시누대(신호대) 대나무로 낚시대를를 만들어 방파제에서 주로 낚시를 했어. 요즘 같은 납으로 만든 추는 구하지 못해 바닷가에서 적당한 돌을 골라 추로 이용했어. 미끼는 요즘 쓰는 고급이 아니고 방파제 돌 팀에서 쉽게 잡을 수 있는 강구를 달아 물에 집어 넣으면 무는 고기들이 많이 있었지. 놀래미나 우럭을 많이 잡았고 잡은 고기들은 말리거나 소금에 절여 솥에 쩌서 먹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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