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벽골제의 역사 문화적 의의

 
  김제 벽골제는 우리나라 농경문화를 대표하는 최고 최대의 저수지 유적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농도 김제의 지평선 축제의 역사 문화적 근간으로서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벽골제의 현황을 보면 부량면 포교리에서 남쪽으로 월승리에 이르는 평지에 남북으로 약 3㎞의 제방이 일직선을 이루며 잔존하고 있다. 제방의 남과 북의 양쪽 끝에 치우진 곳에는 각각 수문이었음을 알려주는 거대한 돌기둥이 한 쌍씩 우뚝 서 있는데, 북쪽의 수문은 장생거, 남쪽은 경장거라 불리고 있다. 최근에는 제방 중앙지점에서 이들 수문과 구조나 규모가 동일한 중심거가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벽골제중수비문에 의하면 제방의 남북 양쪽 끝 쪽에  수여거와 유통거라 불리는 2개소의 수문이 더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벽골제의 제방은 1925년 일제에 의해 농지관개용 간선수로를 만들면서 제방이 크게 훼손되었고, 1961년 장생거의 석주를 노출하여 보존하고자 하는 과정에서도 유적의 일부가 훼손되었다. 1975년도에는 장생거와 경장거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하여 수문의 구조와 규모, 그리고 제방의 축조 방법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2012년부터 전북문화재연구원에서는 김제시와 문화재청의 예산지원을 받아 벽골제의 복원 및 정비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중심거의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수문의 축조공법을 보면, 수문을 설치할 곳에 약 21m의 제방을 우선 축조한 다음, 이 제방을 폭 13여m로 굴착한 후 석재를 이용하여 하인방석, 석주, 호안석을 시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설치된 수문을 중심으로 각각 양 방향으로 제방을 축조하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잔존상태가 양호한 장생거나 경장거의 구조 및 규모를 보면 높이 5.5m 정도의 석주를 간격 4.2m로 좌우 대칭으로 세우고 있는데, 이 석주의 안쪽에는 폭 20cm, 깊이 12cm로 홈을 파서 목재판을 끼워 수량을 조절하도록 했다. 한편 이 석주의 하단에는 하인방석을 끼워 수문이 견고하도록 배려하고 있으며, 그 길이는 석주의 폭과 같은 4.2m, 폭은 84cm가 되고 석주의 안쪽과 같이 홈을 파 목재판을 끼우도록 시설하고 있다. 양쪽의 석주를 중심으로 호안석으로 보강하여 수문의 견고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제방의 횡단면 조사를 통해 확인된 축조 수법을 보면, 연약지반에 제방이 구축되기 때문에 최하단에는 초본류를 촘촘히 펼쳐 깔은 소위 “부엽공법”을 채용하고 있다. 제방의 성토는 작게는 2-3단계, 크게는 10단계의 공정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부엽위에 점토, 실트, 사질토를 교차하면서 축조하고 있다. 때로는 제방을 견고하게 할 목적으로 토낭을 번갈아 쌓은 공법도 확인되었다. 한편 용골마을이 위치하고 있었던 지점의 조사에서는 제방 기저부의 폭이 무려 30m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곳은 현재도 벽골제 유적 가운데 가장 낮은 지형으로 수로가 개설되어 있는데, 아마 과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물에 의해 제방의 훼손이 자주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사결과 길이 75m, 폭 34m의 보축제방이 확인되었다. 특히 보축제방을 긴급 수리하면서 촘촘하게 쌓은 초낭과 작업과정에서 사용된 들것이 발견되어 주목되고 있다.
  발굴조사과정에서 벽골제 제방의 축조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시료를 채집하여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 중심거 부근에서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초축연대인 330년에 근접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용골마을의 보축제방에서는 8~9세기에 해당하는 연대가 추출되어 신라 원성왕대의 대규모 수리기사와 일치함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우리나라 대표적인 농경유적인 벽골제에 대한 문헌기록과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역사 문화적 의의를 추출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점들을 제대로 인식하고 홍보가 이루어진다면, 경쟁력있는 문화자산이 될 것이다.
  첫째, <역사성> 벽골제의 중요성은 무엇보다도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그 시축연대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두 역사서는 모두 벽골제가 ‘신라 흘해왕 21년(330년)’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적고 있다. 330년 당시 백제 영역에 속하였던 김제 벽골제의 축조기사가 ?신라본기?에 적혀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백제 비류왕 27년의 기사가 잘못 기록된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부터 백제본기에 수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김제지역이 백제에 복속된 시기는 ??일본서기?? 신공기의 내용에 따르면 369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벽골제의 축조는 백제의 중앙세력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 김제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던 마한세력에 의해 최초로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점은 벽골제의 제방축조수법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백제초기 유적인 풍납토성과 비교되어 왔으나, 발굴조사결과에서 밝혀진 것은 마한 분구묘의 축조수법과 일치하고 있음에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후 벽골제와 관련된 기록들은 삼국사기 외에, 고려사, 조선시대 왕조실록 등 역사서에서 중수와 관련된 내용들이 다수 보이고 있는데, 농경사회에서 벽골제가 국가적 관심 속에서 관리되어 왔음을 증명하고 있는 자료들이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우리는 김제지역이 한반도 농경사회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곳임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첨단의 토목기술>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330년 처음 벽골제가 축조되었을 당시에는 규모가 1,800보라고 적고 있지만, 이후에 중수과정에서 좀 더 확장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벽골제중수비문?에 따르면, 제방의 높이는 5.23m, 하변의 폭은 21.5m, 상변이 9.24m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제방의 길이는 무려 3㎞에 달한다. 이렇듯 엄청난 규모의 벽골제 제방은 당시 토목 기술력 보면, 오늘날 새만금 방조제나 서산 간척지와 비교되는 엄청난 토목공사인 것이다.
이와 같은 벽골제 축조의 대규모 토목공사는 많은 주민들의 단결된 힘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연을 극복해 인위적으로 물 관리를 가능하게 했던 불굴의 개척정신을 보여주는 산 증거인 것이다. 또한 제방축조 기술은 우리나라 대형 토목공사의 원형이 곧바로 벽골제에서 출발한 것으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국제성> 제방의 축조공법을 보면 누수로부터 제방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먼저 최하단에 식물부재를 까는 부엽공법을 채용하고 있는데, 부엽 위에는 토낭(흙덩이)과 점토를 번갈아 성토하고 상단부에는 인근 산에서 채취한 붉은색의 토사를 이용하여 제방을 축조하고 있다. 이러한 공법은 오사카의 사야마이케의 제방 축조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밝혀져 일본 고대 제방축조기술의 원류가 곧 바로 김제 벽골제였음을 알 수 있는데, 벽골제의 국제성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넷째, <지방통치의 경제적 기반> 벽골제를 이용한 농업 생산력은 매우 높았을 것이며, 이러한 경제적 기반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정치적 집단이 성장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유적이 벽골제 인근 지역에서 조사된 부안 백산성과 정읍 고사부리성이다. 부안 백산성 유적은 동진강과 고부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천혜의 유통 거점으로 주목되는 곳이다. 한편 정읍 고사부리성은 과거 고부 읍성으로 잘 알려져 있었으나 백제시대 지방통치 거점이었던 중방성 고사부리성으로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백제 지방통치의 중심인 중방성의 운영은 벽골제를 통한 농업 생산력의 경제적 기반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벽골제는 우리나라의 최고 최대의 고대 저수지라는 외형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농경문화를 근간으로 삶을 영위해온 우리 민족의 자연극복의 진취적 기상이 담겨있는 유적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김제 벽골제의 수로이설을 통한 그 복원이야말로 농도 전라북도민의 긍지를 되살리는 일이며, 값진 문화유산을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우리 모두의 의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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