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살기에 가장 좋은 땅이 온고을이었다. 나중에 전주라 불렀지만 온고을엔 옛적부터 사람냄새가 가득했었다. 그것은 이곳이 태초부터 사람을 위한 점지된 땅이었기 때문이다. 큰 대륙의 한 가운데서 우뚝 솟은 코카서스 산 머리에는 만년설이 가득하여 태백(太白)이라 하였다. 태백의 기운이 태양을 쫒아 동으로 흘러흘러 머물렀던 곳이 대륙의 끝 한반도였다. 이곳에 큰 산을 만들어 그 이름을 다시 태백이라 하고 동편에는 신들의 땅을 만들고, 서편에는 사람들의 땅을 가꾸었다. 그곳이 동해를 바라보는 경주였고, 태백이 내려와 하늘을 닮은 묘한 지형을 만들었는데 이곳을 온고을이라 불렀던 전주였다. 전주는 그래서 특별한 곳이었다. 전주는 그래서 우주의 형상을 하고 있다.

생명의 공간 즉 생성의 원리를 운용하는 우주는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과 땅은 서로 교합하며 무한한 생명의 순환을 엮어내고 있다. 전주는 일찍부터 그런 곳이었다. 북으로 건지산(乾地山)과 물을 건너 남으로 곤지산(坤地山)이 마주하고 있다. 건지산은 마치 어머니가 사랑스런 아이를 품으려는 듯 한 모습으로 부드러운 손길을 뻗어 너른 들을 내었고, 곤지산은 그것을 받아들려는 자세로 건지산을 향해 서 있다. 건지는 하늘이라는 뜻이고 곤지는 땅이라는 말이다. 그 경계에 전주천이 흐른다. 마치 은하수처럼 흐른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하늘의 견우와 땅의 직녀가 그리워하듯 그렇게 마주하고 있다. 그 한 가운데에 전주성이 있었다. 건지산에는 그곳이 당연히 하늘의 점지임을 알려주려는 듯 조경묘가 세워졌다. 조경묘는 전주가 왕조의 발상지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소나무 숲이 울창하였었다. 그리고 건지산 뒤 널따란 들녘에는 봉황이 살았다. 물길이 넓은 만경강이 흐르고 그 주변은 기름진 땅이었다. 이곳에 후일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하면서 이름을 봉동이라 하였다. 건지산 아래 동편에는 그야말로 천년 숲이 살았는데 전주 천에서 목을 축인 학들이 이 숲에서 놀았다. 사람들이 이곳을 노송동이라 불렀으며 노송동 아래 천변을 학동이라 부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천년 노송은 건지산 줄기들이 동남으로 바람처럼 잔잔하게 풀어져 내린 언덕위에 서 있었다. 하늘세계의 풍광이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 동쪽 산자락에는 오동나무가 무성하였는데 이곳에는 건지 머리맡에서 살았던 봉황이 가끔씩 날아들어 쉬어가던 곳이었다. 태조 이성계가 여기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오목대라 불렀던 것은 그런 연유였다.

건지산 서편아래에서는 건지를 우러러 조석으로 칭송하는 소리가 높았다. 아마도 건지산을 등에 없고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염원이었을 터이다. 그 염원의 소리가 하늘을 칭송한다하여 사람들은 이곳을 송천동이라 불렀다. 건지산이 이 고을에 내려 보낸 것은 덕(德)이었다. 즉 사람들이 가장 갖추어야 할 삶의 지표로서 예의이고 겸손이었다. 사람 사는 곳에 예와 겸양이 넘쳐 연못을 이루는 곳 이곳을 사람들은 덕진이라 불렀다. 그리고 덕진 옆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아름다움을 가꾸고 풍요를 이루어내는 곳이 다가(多佳)와 풍남(豊南)이었다. 그리고 건지가 내린 덕을 모아 쌓아진 것이 고덕(高德)산이다. 고덕이 동남으로 뻗어 사람의 땅을 이루었는데, 그 기세가 건지산을 향해 내려오다 전주천 앞에서 멈추고 곤지가 되었다. 곤지산은 짙푸른 물길 넘어 건지를 향해 서 있다. 곤지는 하늘을 떠받치는 땅이고 생명을 잉태하는 기운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곤지산을 초록바위라고 불렀다. 초록은 땅의 다른 이름이고 또한 생명의 상징이 된다. 곤지는 생명을 키우는 곳이며 또한 사람을 거두는 곳이기도 하다. 곤지산에는 5월이 되면 쌀을 상징한다는 이팝꽃으로 그윽하다. 사람을 살리고자하는 곤지의 속마음이 꽃으로 피어난 것이리라. 이팝꽃이 피고나면 농사철이 다가온다. 농사가 끝나고 그 풍족함이 모이는 곳이 곤지산 앞 다리건너 싸전이다. 아마도 곡물거래 점포들이 모여 있어 쌀전을 후일 싸전이라 불렀을 것이고, 그 자리에 지금은 싸전다리와 남부시장이 남아있다. 그런가하면 이곳 곤지산은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참형장이기도 하였다, 죄인들을 이곳에서 효수하였고 또한 나이 어린 천주교도가 순교를 당했던 순교지로 남아있다. 그런가하면 이 땅의 자존을 지키려던 동학 장군 김개남도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그런 일들은 모두 사람들의 일이고 그래서 사람의 땅에서 이루어졌다.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곤지산 자락이 사람의 땅임을 또한 모악에서 찾는다. 모악은 곤지의 다른 이름이며, 표상이다. 한발 건너에서 포근한 어머니의 품속처럼 온화하고 넉넉한 모습이다. 치마폭을 펼치고 앉은 자세는 곤지산의 기운을 받는 형세를 하고 있다. 그 사이에 평화동과 효자동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사람의 온기가 가득하다는 것을 말한다. 자식이 번성하고 삶이 넉넉하여 편안한 곳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전주는 천지의 형세를 갖춘 특별한 곳이었다. 잔바람은 노송에서 놀다갔고, 큰 태풍

은 고덕산이 잡아주었다. 고덕은 온고을의 덕을 쌓아놓은 곳이니 어찌 재해를 두고 볼 수 있었을까. 북풍 찬 기운도 건지산을 넘기 힘들었을 터이다. 이곳은 말하자면 사람들을 위한 자리이기도 했고, 또한 하늘의 뜻을 펼치기 위한 땅이기도 했다. 하늘의 뜻은 다름 아니다. 사람들이 모여 안락하고 넉넉한 삶을 이루며 하늘을 우러러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주는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이고 풍류가 넘쳐났다. 우선 먹을거리가 넘쳐나야 했다. 산해 물산들이 모여들어 지지고 볶으며 음식향이 천지에 이르러야 했다. 그래서 음식의 고장이다. 먹을거리가 넘쳐나니 저절로 풍류가 흘렀다. 사람들은 저마다 소리를 했다. 너나없이 귀 명창 소리명창이었다. 그래서 소리의 고장이었다. 그러니 또한 학문이 깊어져 책을 만들고 종이를 생산했다. 그러나 풍족한 음식과 아름다운 소리가 어찌 사람들의 것이었겠는가. 그것은 하늘 즉 건지를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지난 역사들이 이제 다시 온고을에 모여들고 있다. 다시 천지의 기운이 솟아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한옥마을에서 그 실체를 본다. 먹을거리가 넘쳐나고 곳곳에서 공연 소리가 요란하다. 거리에는 각방에서 몰려든 인파들의 밝은 눈빛으로 한옥은 더욱 돋보인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젊은 남녀들은 분명 건지에서 내려

온 선남선녀임에 틀림없다. 그 모습이 전주의 미래이고 희망인 것이 분명하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