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한 모퉁이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길 위의 나무들이 본연의 푸르른 색을 더욱 진하게 밝히는 마을이 도심에 있다. 바로 다가산 인근에 있는 전주의 선너머 마을이다.
역사의 발자취와 우리들 이야기가 머물러 있는 곳, 선너머 마을을 찾았다. <편집자주>

《 선너머 마을길 》

▲ 다가공원길

일상에 지쳐 무뎌진 감각을 끌어내 발 딛는 곳마다 전해오는 미세한 변화에 귀를 기울이고자 찾은 용두봉과 다가산 인근에 자리 잡은 선너머 마을.
마을로 행하는 길 위의 나무들은 여름을 맞아 본연의 푸르른 색을 더욱 진하게 밝히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화산서원’이 있었고 서원을 지나면 미나리와 딸기를 재배하는 여러 마을이 있었는데 이곳은 ‘서원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선너머 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청녹빛 나무 숲길 사이 선너머 지역에는 다른 마을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것들이 있다.

그 첫 번째가 선너머 마을길이다.
지리산의 둘레길, 제주도의 올레길처럼 선너머 마을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숨 쉬는 선너머 마을길은 모두 3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1코스는 사색을 위한 산책길로, 배꼽샘을 시작으로 옛 방죽자리, 완산동에서 중화산동으로 넘어오는 옛 오솔길, 오래된 둥구나무, 도심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탱자나무 담, 역사가 있는 화산서원비, 임진왜란때 이순신장군과 함께 바다에서 활약했던 이영남 장군의 사당인 선충사, 100년이 넘은 일본식 낡은 기와집, 무궁화 꽃이 피어있는 담벼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곳을 걷다보면 주변 가까이에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귀한 보물들이 산재하며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다가공원 불망비와선정비

계몽과 독립의 길 2코스는 다가천변으로 관찰사 원인손 불망비 외 26기의 불망비와 선정비가 있는 다가공원을 시작으로 역사의 아픔이 살아있는 다가교를 지나 일제 강점기의 아픔과 독립을 느낄 수 기전학교와 신흥학교, 3.1운동 기념비와 근대문화유산인 스미스기념관을 볼 수 있다.

또한 선교사 묘역과 예수병원을 지나 옛 선비들이 학문을 닦았던 교실(강당)을 오르내리는 고개라 하여 강당제라 불리는 곳을 지나면 엠마오 사랑병원 주차장 쪽문을 마주하게 된다.

이곳을 지나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이 들 정도의 새롭고 놀라운 풍경을 보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다가산이다.

 다가산 정상에는 일제 강점기에 신사가 있던 곳으로 광복 후 전주시민들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전주신사를 해체하고 세운 호국영령탑과 가람시비가 있다.
다가산의 정상에서 내려가다 보면 왼편으로는 역사의 현장인 천양정이 있는데, 천양은 버들잎을 화살로 꿰뚫는다는 뜻으로 지금도 많은 궁사들이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 과녁을 향해 화살을 당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곳을 옛 선조들을 생각하며 걸어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3코스는 추억과 소통의 길로, 따박골의 초등학교 담벼락에는 어린이들이 쓴 예쁜 시와 그림, 흑백과 칼라가 어우러진 공원 및 전통놀이 모습 등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어른들에게는 담장 갤러리를 보며 옛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곳이다.
담장 갤러리를 지나 골목을 따라 걷다보면 붕어빵처럼 비슷하게 지어진 많은 주택들이 나란히 있는 걸 볼 수 있다. 1980년대 화산지구 택지개발 당시 들어선 주택으로 외형은 같지만 사는 사람들의 삶은 각양각색 저마다의 모습을 담고 있다.

《 중화산동의 숨구멍 배꼽샘 》
 

▲ 배꼽샘

선너머 지역의 또 하나의 특별한 것은 다른 지역에서 도심개발로 볼 수 없는 화산샘터이다.
화산샘터는 옛부터 선조들이 우물과 샘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생활하는데 필요한 물을 충당했던 곳이다. 이곳 선너머 마을에도 여러 개의 우물과 샘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최고를 배꼽샘으로 꼽았다.
많은 도시개발과 난개발에도 불구하고 배꼽샘은 물맛도 좋을 뿐더러 아무리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시원한 물이 계속해서 솟아올라왔기 때문에 선너머 마을 사람들은 배꼽샘을 ‘중화산동의 배꼽자리’ 또는 ‘중화산동의 숨구멍’이라 불렀다.
그러한 배꼽샘이 지난 10여년간 방치돼 마실 수 없게 되었으나, 샘을 살리기 위해 지역민들이 힘을 모아 작년 도심에서 처음으로 샘제를 올리는 등 샘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 같은 노력으로 배꼽샘은 약수보다 오염되지 않은 깨끗하고 완전한 물로 판명, 매우 뛰어난 수질과 물맛으로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생명의 젖줄이 되었다.
이렇게 선너머 마을은 오랜 전통과 문화재가 있고, 지역을 생각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어느 곳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배꼽샘을 가진 유일한 곳이 되어 도심 속의 새로운 휴식처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 선너머 마을의 문화유산 》
  중화산동 선너머 마을에는 호국영령탑과 가림시비, 근현대의 아픔을 간직한 신사가 있던 다가공원이 있으며 일제시대 완산칠봉 머리부분을 잘라 신작로를 내는 등 애환이 서린 용두봉과 화산서원비(문화재자료 제4호), 천양정(문화재자료 제6호) 등 문화재 등이 고스란히 남겨있다.
또 전주병원과 예수병원, 우석한방병원, 예수대학교와 기전대학교, 스미스 기념관, 설대위 기념관 등 근대문화유산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 전주향교의 중화산 시대와 화산서원 》
  원래 전주향교(鄕校)는 고려 우왕 6년에 전주부 남쪽인 지금의 경기전 부근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 태종 10년(1410년)에 “이 땅은 고려가 아니고, 조선이 건국되었음을 일반 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태조의 어진을 조선임금과 똑같이 모셔라”는 뜻으로 전국 6개소(시조가 있는 전주, 태조이성계가 태어난 함흥,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조선의 수도 한양)에 어용전 또는 진전(세종때부터 전주는 경기전)을 짓고 태조어진을 모시게 되자, 인접하고 있는 향교에서 ‘독강하고 있는 소리와 회초리 치는 소리가 시끄러워 성령을 안위케 하는데 어긋난다’고 하여 세종 23년(1441년)에 전주부의 서쪽인 중화산 기슭에 이전했다.
여기에 선조 11년(1578년) 조선 전기의 대학자 이언적과 송인수의 위폐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화산서원이 있었다.
그러나 향교는 전주천 월천이 불편하고 풍패지관(객사)을 기준으로 좌묘우사(左廟右杞) 주례(周禮)에 따라 선조36년 (1603년) 교동으로  옮겨가기까지 162년간 동안 이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후, 향교가 이전하고 남은 화산서원은 나라에서 이름을 지어주고 후원하는 사액서원으로 선정되기도 하는 등 210년간 존치하다가 고종 5년 (1868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되었고, 서원비(書院碑)만 남아 있다.
화산서원비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 위에서 구름 속을 거니는 용의 무늬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머릿돌을 쓰고 한껏 위용을 뽐내며 그 시절의 화려했던 명성을 말해주고 있다.
명성만큼이나 6.25전쟁 당시 맞은 총알 몇 방의 흔적 또한 그대로 남아 있어 아픈 민족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우암 송시열이 지었고 글씨는 송준길이 새겨 넣은 이 비문은 선조 13년(1580년)에 세워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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