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에 살면서도 부안에 고려청자가 있었나? 하고 의아해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부안지역은 전남 강진과 쌍벽을 이루며 고려청자의 메카였던 곳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고, 전문 연구자도 매우 빈약한 상태라 인식하는 사람들이 극소수이다. 부안 고려청자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일본인학자 노모리 켄(야수건野守健)에 의해 최초로 발견?조사되었으며, 당시 강진에 버금가는 가마터라고 학계에 보고되었다. 1938년 유천리 12호 청자가마터에서는 비색청자?상감청자?무문백자?상감백자와 함께 동화청자가 혼재된 유물층이 발森퓸珦만�, 이후 일본인들에 의해 많은 청자 파편이 도굴되었다.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유천리 출토 청자가 약 5,000점정도 소장되어 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신덴 야수토시(深田泰壽)가 유천리 12호 가마터에서 도굴하여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것을 1958년에 구입한 것이다.

▲ 청자상감인물무늬 매병

이 유물의 일부는 1983년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서 출간한『扶安柳川里窯 高麗陶瓷』라는 도록에 소개된 바 있다. 그 후 深田泰壽가 소장했던 일부 유천리 청자편은 동원 이홍근 선생의 소장품에 들어갔다가 198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어 현재 보관?전시되고 있으며, 국립전주박물관 2층 미술실에도 일부 전시되어 부안 고려상감청자의 아름다움을 단편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부안에 있는 77개소의  고려청자가마터는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사적으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부안지역 청자가마터군 전체에 대한 정밀한 지표조사는 1993년에 원광대학교 馬韓?百濟文化硏究所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 조사의 목적은 유천리와 진서리 지역에 분포하는 고려청자가마터 관련 사적지 범위를 최소화 하여 군민의 재산권 침해와 피해를 막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조사를 통해 사적지 범위가 확대되고 말았다.
이 조사에서 진서리 청자가마터군은 6개 구역에 40개소의 가마터가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유천리 청자가마터군은 7개 구역에 37개소의 가마터가 존재하는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정식으로 문화재 시굴?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청자가마터는 진서리 18호?20호 가마터와 유천리 7구역 5개의 가마터군이 있다.

 

부안 고려청자의 특징과 역사적 의미
부안청자박물관에는 1년 평균 6만 명 정도의 관람객이 찾아온다. 관람객 중에서 많은 분들이 가장 의아해 하는 부분이 고려청자 하면 강진이 유명한 줄 아는데 강진 청자와 부안 청자는 무엇이 다른가? 라는 질문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궁금해 하실 부분일 것이다.
앞의 문화재 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 중에서 공통된 점이 있는데 바로 부안 고려청자가 만들어진 시기이다.
부안 고려청자는 대략 12세기 후반~13세기(1,150년대 이후~1,200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는데, 부안 고려청자의 제작 시기는 고려왕조 500년 역사상 청자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에 해당된다.
반면 강진 고려청자는 11~14세기(1,000년대~1,300년대), 즉 고려왕조 전 시기에 걸쳐 청자를 만들어냈다.
단적으로 비교하면 부안 유천리와 진서리의 약100여기에 달하는 청자가마는 12세기 후반~13세기까지 단기간에 대량으로 청자를 생산해냈고, 강진은 약188여기에 달하는 청자가마가 11~14세기의 긴 기간 동안 운영된 것이다. 
따라서 부안지역 가마가 활동하던 고려청자 전성기에는 강진에서 운영하는 가마가 부안에 비해 적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 청자 상감동화 국화무늬 합

그러면 부안고려청자의 대표적인 특징, 즉 우수성에 대해 몇 가지를 살펴보겠다.
우선 가장 대표적인 특징으로는 화려한 상감청자 무늬에 있다. 하얀색과 검은색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흑백상감청자는 부안 고려청자의 정수이다. 무늬는 단순히 모란이나 국화와 같은 꽃문양을 반복하여 새긴 것도 있지만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부안만의 독특한 정서가 드러난 특징적인 무늬가 있는데, 예를 들면 물가의 고즈넉한 자연 풍광을 담은 무늬(물새가 유유히 물 위를 헤엄치는 가운데 물가에 버드나무와 갈대가 하늘거리는 모습)라든가 부부가 아름다운 정원에서 시를 감상하고, 쓰고, 악기를 연주하는 고려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무늬, 소나무 그늘 아래 선비가 거문고를 타자 날아가는 학이 흥겨운 장단에 이끌려 내려와 날개를 펴고 우아하게 춤을 추고, 소나무조차도 참을 수 없어 나뭇가지를 지그재그로 틀며 흥겨운 장단을 맞추는 무늬, 동자승이 비록 스님이기는 하지만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마음으로 메뚜기를 잡아 망에 넣고 즐겁게 노는 장면을 새긴 무늬 등은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세계 유일의 하나 뿐인 부안 고려청자인 것이다.

고려시대 부안 유천리와 강진 사당리 청자가마에서 13세기 전반 무렵에 제작에 성공하였는데 부안과 강진의 산화구리 안료는 표현수법이 좀 다르다. 강진 사당리 청자가마터에서는 산화구리안료를 그릇 전체에 씌운 동채청자만 발견되었으며, 부안 유천리 12호 청자가마터에서는 동채와 더불어 모란꽃이나 포도동자무늬를 상감하고, 이 무늬의 일부분(모란꽃잎 끝부분, 포도송이 등)에 산화구리로 포인트를 주는 방식의 상감동화청자가 제작되었다. 짐작하셨겠지만 산화구리 안료는 다루기가 어려운 만큼 제작된 유물의 양이 극히 적어 희소의 가치가 매우 높으며, 붉은색은 왕을 상징하기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일반 사람들은 붉은 색 사용이 금지된 만큼 동화?동채 청자는 왕실과 특수층을 위한 맞춤형 작품이었음은 짐작할 만하다. 
제작지가 명확히 알려진 동화청자로는 현재 부안청자박물관과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부안 유천리 12호 청자가마터 파편이 소량 전해지고 있을 뿐이며, 그 외 지역은 알려진 바가 없다. 동화청자로 가장 명품을 꼽으라면 삼성리움미술관 소장의 국보 제133호인 ‘청자동화연화무늬표주박모양주자(靑瓷銅畵蓮花紋瓢形注子)’가 있다. 이 유물은 고려 무인정권의 최고 권력자였던 최항(崔沆, ?~1257년)의 무덤에서 묘지석과 함께 출토되었다고 전해오는 것으로 1257년을 전후한 시기에 부안 유천리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세계 10대 도자기 중 하나로 유명하다.

▲ 부안 유천리Ⅶ구역 5호요지 세부모습

눈부신 햇살처럼 투명한 백색이 빛나는 고려시대 도자기가 있는데, 이름하여 ‘고려백자’라고 한다. 고려시대 ‘청자’ 말고, ‘백자’가 있다는 자체가 독자분들께는 매우 생소하실 것이다. 원래 고려 초부터 청자와 함께 백자도 만들어졌었는데, 고려 중기로 들어서면서 백자는 사라지고 청자를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고려시대 청자가마터 중에서 ‘부안 유천리’와 ‘강진 사당리’ 지역의 각 1곳에서만 고려백자를 극소량 만들었으며, 오늘 날 전해지는 수량이 워낙 적기 때문에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백자의 용도와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연구된 바가 없다.
더욱더 흥미로운 사실은 부안 유천리에서 만들어진 고려백자에만 흑상감 무늬가 새겨져 있다는 점이다. 흑상감이 장식된 고려백자는 매우 희귀하여 온전한 형태로 알려진 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몇 점밖에 없으며, 이 외에 파편으로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유천리 고려청자가마터 출토유물이 소량 있다.
고려상감백자의 대체적인 특징은 비색이 살짝 감도는 투명한 유약 아래 우유빛깔(乳白色)이 감도는 따뜻한 질감의 바탕흙, 거기에 검은색 꽃무늬가 아로새겨져 있으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부안 유천리에서만 유일하게 제작된 귀하디귀한 유물이다.

끝으로 부안 고려청자의 특징은 우리 지역에서 나오는 자토(자기를 만드는 흙)에 의해 나타나는 신비로운 비색에 있다. 고려청자는 유약 아래 새긴 무늬를 드러나 보이게 하기 위하여 유약을 최대한 얇게 입힌다. 투명하고 얇은 유약 아래 비치는 상감 문양은 실루엣을 보는 듯 섬세한 맛이 감돈다. 그런데 부안의 청자를 빚는 흙은 강진에 비해 철분이 약간 더 함유되어 있어서 굽게 되면 회색이 짙게 나온다. 여기에 비색이 설비치는 청자유약을 입히면 회색 바탕흙 색깔이 유약 사이로 비쳐 밝고 청명한 대낮보다는 달빛이 어스름한 저녁하늘 빛을 연상시킨다. 드러낸 화려함과 청량함이 아닌 은근히 멋을 부린 귀티 나는 귀부인의 기품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그 무엇인가가 부안 고려청자에는 숨어 있다.

장문의 글로 독자분들께 구구절절이 설명을 드렸지만 결론은 한 가지이다.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부안 고려청자의 특징과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학술적으로 꾸준한 연구를 통하여 우리 민족이 잃어버렸던 유일한 고려청자문화의 전통을 되살리고, 후대에 가능한 많은 문화자산을 물려주자는 것이다. 미래는 물질이 아닌 정신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며, 정신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민족의 뿌리와 역사가 살아있는, 즉 전통문화와 뿌리가 살아있는 민족이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이러한 사실을 벌써 간파하였던 우리민족의 위대한 인물, 간송 전형필 선생!
당시 최고급 한옥20채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으로 지켜낸 구름학문양이 꽉 차게 새겨진 부안 유천리 고려청자 매병(일명 ‘천학매병’)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야마모토라는 일본인 도굴꾼이 강화도에 있는 고려무덤에서 파낸 천학매병을 일본인 골동품 거간인 스즈키 다케오에서 기와집 한 채 값(1,000원)을 받고 팔았다. 스즈키는 이틀 만에 다른 거간에게 1,500원을 받고 넘겼고, 이를 넘겨 받은 거간은 대구의 치과의사 신창재에게 4,000원에 넘겼다. 신창재는 경성 필동의 골동품상 마에다 사이이치로에게 6,000원에 팔았다. 이 매병에는 실제로 69마리의 학이 새겨져 있지만 빙빙 돌려 보면 천 마리의 학이 나는 것처럼 보여 마에다는 이 매병에 ‘천학매병’이라는 명칭을 붙였으며, 조선총독부에서 이 매병을 1만원에 구입하여 했으나 팔지 않았고, 마에다는 2만원에 이 매병을 팔고자 하였다. 당시 2만원이면 경성 시내에 여덟 칸짜리 기와집 20채 값이었다. 신보(간송 선생의 일본인 거간)가 전형필에게 이 매병 사진을 보여주었고, 선생은 바로 다음 날 마에다를 찾아갔다. 이제까지 한 번도 거래되지 않았던 거액 2만원을 현금으로 덥썩 내밀며 마에다와 거래를 성사시킨 것이다. 천학매병이 간송 선생의 수중에 들어온 후 일본인 대수장가 무라카미가 두 배의 금액을 제시하고 사려했으나 간송은 끝내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명품을 건네주지 않았다.

부안고려청자의 가치는 유물 자체로서의 가치와 청자를 만들어낸 ‘가마터’라는 유적으로서의 가치, 그리고 무형문화재로서 청자제작 방법의 전통 계승의 가치가 고루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가치는 아닐 것이다.
전 세계인이 인정하는 고려 최고의 공예와 예술, 문화가 함축된 훌륭한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로 한 걸음 발전시켜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 사랑받는 문화유산이 되기 위해 고려청자유적지를 잘 보존하고, 학술연구를 통해 가치를 증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박물관 전시를 활성화 하고, 아울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부안청자박물관 학예사 한정화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