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의 특색으로 빠지지 않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부채’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시대에는 왕에게 진상할 정도로 질 좋은 부채를 만드는 전라감영 선자청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면 이후에는부채장인 30명이 집단을 이뤄 사는 이른바 부채마을이 존재했고 오늘날에는 여러 도 무형문화재 선자장들과 이수자들까지 그 맥을 이어나가고 있어서다. 
  이렇듯 부채의 도시 전주에는 한 가지 숙원이 있었는데 얼마 전 앓던 이가 쑥 빠지듯 해결됐다. 도 차원의 문화재에 머물러 있던 선자장 종목이 중요무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된 데다 전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선자장 김동식(72·합죽선)이 그 첫 번째 보유자가 된 것.
  왕실에 진상하던 ‘50살 백첩선’을 비롯해 조형적인 아름다움이 그만인 ‘윤선’, 한지의 칠에 따라 달라지는 황칠선과 옻칠선, 한지와 부채만의 아름다움을 보이기 위해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백선, 일본인이 좋아하는 작은 부채에 이르기까지…폭넓은 작품세계를 보여주며 합죽선의 역사를 새로이 쓰고 있는 그를 20일 찾았다.  

▲ 전국 최초 선자장이다. 소감이 어떤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했고 꼭 중요무형문화재가 돼야 한다는 건 아니었던 터라 오히려 담담하다. 문화재청 간담회에 갔다가 없는 종목도 서류 만들어서 내라고 하기에 지역 장인으로서의 책임감에 지원하게 했다.
  만만치가 않더라. 이전 사례도 없고 나이도 있다 보니 서류 만드는 공정이 너무 복잡하게 느껴졌다. 신경 써서 쓴다고 써도 다시 보면 오자가 너무 많아 그거 고치느라 3, 4개월이 지나갔고 공정 사진을 더해 완성하기까지는 1년 8개월이 걸렸다.   
  전북 3명, 전남 2명 등 5명이 서류를 냈는데 나만 합격해 홀로 2차 시험을 봤다. 그렇게 총 3년이 걸려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 얼마 되지 않아 실감은 나지 않지만 전주 장인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다는 데 만족한다.

▲ 부채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과정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다들 먹고 살기 힘들 때라 기술이 있으면 굶어죽진 않을 거란 아버지의 권유로 외가에서 부채 일을 시작했다. 외가는 140년 동안 부채를 만들어왔는데 ‘합죽선’을 진상할 만큼 뛰어난 명인이었던 외조부 라학천과 외삼촌 라이선 라태순, 라태용 순으로 이어졌다.
  4대째인 나는 처음엔 허드렛일만 했고 연장 같은 건 손도 못 댔다. 언젠가부터 어깨너머로 따라 하기 시작했고, 손재주가 있었는지 대나무를 예쁘게 힘도 안 들이고 깎자 외삼촌들이 칭찬해줬다. 칭찬받으니 더 열심히 하게 됐다. 
  그렇게 8년 동안 배운 후 독립했다. 살 깎고 종이를 바르는 등의 기본적인 것들은 숙지했지만 낙죽이나, 광, 도배 같은 건 한 번씩 해 보고 내 식대로 해 나갔다. 

▲ 어려움도 많았을 거 같다.
지금이야 먹고 살 정도는 되지만 과거에는 생활이 안 돼 부업으로만 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농산물을 비롯한 여러 가지를 팔다가 10월경부터 하지 전까지 부채를 만들었다. 습기 때문에 자칫 삐뚤어질 수 있어 6월 중순까지 끊임없이, 바삐 만들었다.
  지역 무형문화재가 된 후에도 열악한 작업환경과 전수자 하나 마음 놓고 두지 못하는 실정은 여전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9~10시까지 쪼그리고 앉아서 대밭에서 대나무 작업을 하는 것부터 부채 손잡이 부분에 장식을 박는 일까지 100여 번의 각기 다른 공정을 이어가야 했고, 앞으로도 공정이 기계화돼서 일률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은 불가능하다. 재료비 또한 만만치 않지만 다른 공예품에 비해 대우 받지 못하는 것도 그대로다. 
  재작년엔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찾아와 한 숨 돌렸으나 지나치게 많은 근무시간과 임금을 이유로 떠나, 다른 일을 하던 아들을 데려와 가르치고 있고 큰 손자에게도 전수할 계획이다. 아내도 옆에 앉아 돕기 일쑤다.

▲ 그럼에도 합죽선을 만드는 이유는
합죽선은 세계를 통틀어 전주밖에 없다. 내가 그만두면 그 생명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기에 더욱 사명감을 갖고 있다. 자체로도 얼마나 아름답고 실용적, 영구적인가. 종이가 뜯어질 시 다시 붙이면 되고 살은 물만 안 들어가면 계속 쓸 수 있다.
  완성하면 뿌듯하고 받은 분들이 기뻐하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이유다. 언젠가 내 합죽선이 국가기관을 통해 외국인들에게 전해졌을 때 그렇게 좋아했다더라. 잘만 활용한다면 국가 이미지를 올리고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있는 만큼 계속해서 이어나갈 계획이다. 합죽선의 가치를 홍보하는 일은 지역과 국가 각계각층에서 관심을 가지고 추진해 줬으면 한다.

▲ 앞으로의 방향은
아직까지도 합죽선을 만드는 게 수월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100개를 만든다 해도 내 마음에 딱 드는 건 몇 개 안 되고 부족한 것들이 계속해서 보인다. 그것들을 매번 고쳐가면서 오늘날에 이르렀고 아마 앞으로도 그것의 반복이지 않을까 싶다.
  만드는 과정을 체계화할 생각도 있다. 공정이 너무 힘들기도 하고 사람마다 다 다르다. 일부는 기본적인 것조차 무시한 채 대충 만들어 팔아버려 전주 부채의 가치와 이미지를 훼손시키기도 해 문제가 심각하다.
  이러한 일들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전북 장인들끼리 힘을 모아야 한다. 나이든 사람들은 이제와 뭘 할 수 있겠냐고 하고, 젊은 사람들은 개성만 강조하며 대화하려 하지 않으니 단합이 안 되고 있지만 뜻을 나눠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전주 부채의 맥을 이으면서 부채를 활성화하고 브랜드화하기 위해서는 말이다./이수화기자?waterflower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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