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비가비가 되어라. 하늘의 부름을 받았지만 그것은 차라리 천형(天刑)이라고 해야 했다. 운명이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차별은 없다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지만, 그러나 그 옛날엔 사람사이에도 차별이 심했었다.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엄연할 진데 천형이 아니고서야 그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권삼득(權三得. 1771-1841)이 그랬다. 양반이 소리꾼이 된다는 것은 천형이나 다름없는 가혹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대체 소리가 무엇이 간디 그는 반가에서 성명을 지우면서까지 목숨을 걸었을까? 그것을 사람들은 운명이라 불렀다. 그렇게 하여 권삼득은 한국의 소리를 음악으로 살려낸 최초의 菅걋� 되었다. 양반으로 소리꾼이 되었다하여 비가비라 불린다 한다.
 

그는 소리가 영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실로 그의 나이 열두 살, 매우 어린나이에 들었다. 이처럼 어린 아이의 운명을 바꿀 수밖에 없었던 우리 소리는 특별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왜 우리노래를 노래나 음악이라 말하지 않고 그냥 소리라고 부르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 하는 노래가 아니라 하늘이 뜻을 내려 보내는 신명(神命)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처럼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혼의 울림일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 소리는 샤만(무당)들이 하는 것이었다. 신들이 뭇 사람들의 가슴에 내리는 울림 그것이 소리였다. 권삼득이 살았던 시절까지만 해도 소리는 무당들의 집안에서 내려 받는 광대들의 굿판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한다. 그래서 오늘날의 모든 예술이 본시 오래전 제례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연구는 사실 거의 맞는 말인 듯하다.
 반듯한 양반가문에서 출생한 권삼득은 어느 날 글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하은담(河殷潭)이 부르는 판소리 <춘향전>을 어깨너머로 듣고서 큰 울림을 얻었다. 겨우 나이 12살이었다. 그리고 그길로 그는 판소리에 귀의했다. 이는 그에게 마치 신 내림이라고 말해야 할 일이었다. 그것은 분명 천명이었다. 어린 나이에 내려진 가혹한 천형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이 땅에 내려온 신명을 짊어져야 하는 운명을 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가리비가 되었다. 그의 호 삼득은 하늘이 지어준 이름이라 불러야 했다. 그리고 그는 이 땅의 전설이 되었고 신화처럼 내려왔다. 어찌 야훼(하나님)가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는 모세에게 준 천명과 다를 리 있었을까. 
 

그가 태어난 곳은 완주 용진 구억리다. 용진은 덕유산 기운이 용이 되어 태양신을 찾아 가다 만경강물을 마시려 잠시 쉬어 앉은 산자락이다. 초포다리만 건너면 곧바로 태양신이 거주하는 전주 건지산에 이른다. 그러나 강을 건너기보다 차라리 찰랑대는 만경강 물빛 속에서 이웃에 사는 봉황과 노는 재미가 더 크다. 그래서 사람들이 차라리 이곳을 용진과 봉동이라 불렀다. 권삼득은 이곳 용 바위 사이 매미날개처럼 생긴 매미혈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온다. 이는 하늘의 계시임에 틀림없다. 용은 훗날 그가 국창으로 성장하는 인물임을 예시하고 있으며 매미 혈은 아마도 큰 소리꾼이 될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가리비로 성장하기에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열두 살에 들어선 소리 길은 험난하고 고단한 것이었다. 양반으로 태어나 광대가 되었다하여 문중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기도 하였고 부친으로부터 덕석몰이를 당하기도 하는 등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에게 주어진 가장 어려웠던 일은 스스로 소리를 이어내야 하는 독공의 길이었다. 그것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도 없고 또한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예측할 수 없는 소리길을 걷는 것이었다. 차라리 허공을 걷는 것이었고 그래서 어쩌면 하늘 길과 같은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길은 천지와의 싸움으로 얻어지는 고통의 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천형이라 했다. 그는 용 바위 뒤 깊숙이 자리한 위봉사에 머물며 위봉폭포와 싸웠다. 그리고 남원으로 흘러가 지리산과도 겨뤘다. 어찌 그뿐이랴. 구억리 뒷산 작약골에는 소리굴이 있어 그의 소리공부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렇게 해서 그는 이전에 아무도 가지 못했던 새로운 소리 길을 열었다. 그는 한국 역사에서 최초로 새로운 더늠이었던 설렁제를 만들었다 한다. 음악에 깜깜한 필자가 헤아리기에는 어렵지만, 그가 새로운 소리를 창작했다는 말이다. 그 후 많은 소리꾼들이 자신들의 더늠이를 개발하여 소리를 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전해오던 소리에 개인적 창작이 가미되어 새로운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신들의 소리가 이제 인간의 노래로 탄생되었던 것이다. 권삼득은 사람의 노래를 부르고 싶었던 듯하다. 마치 모세가 에굽 땅에서 고통 받던 백성을 구했듯이 권삼득의 소리가 훗날 세계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아 민족의 자긍심을 구한 것은 오래전부터 준비된 하늘의 뜻이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의 소리를 다 얻어 삼득이라 하였다 하나 그것은 실상 소리가 아니라 천지가 그에게 맡겨준 큰 뜻이었다고 보아야 했다. 말하자면 권삼득이 양반으로 태어나 천민들만이 불렀다는 광대소리를 찾아 나선 까닭을 읽어야 했다는 것이다.
 

용진 구억마을 담장 안에 피어있는 맨드라미가 붉게 피어있는 이유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태풍 고니가 데려온 먹구름이 작약골을 휘돌고 있는 까닭도 알기 어렵다. 권삼득이 만든 노래를 왜 굳이 소리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맨드라미는 봉황의 벼슬이고 먹구름은 용들의 바다이다. 소리는 사람의 노래가 아니라 하늘의 영혼이다. 가을이 가까워 징그럽게도 울어대는 매미소리는 마치 삼득의 무덤 옆 소리 굴에서 “내 소리 받아 가거라”라고 외쳤다는 그 때 그 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죽어서도 소리를 놓지 않아 작약골에서는 저녁 삼경이면 판소리가 울렸었다 한다. 오늘도 봉황과 용이 찾아들어 그 소리를 얻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구억리는 구만리를 지나 있는데 그처럼 아득하고 깊은 구억마을 입구에 서있는 “국창 권삼득생가”라는 안내판은 참으로 초라하였다. 그 시절 마치 천하디 천한 광대의 모습을 보는 듯 하였다. 그러나 국창이라는 글귀는 참으로 엄정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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