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 오늘날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겐 멀고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얘기지만 당시를 살아낸 이들에겐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분단된 시기였다. 땅 덩어리 뿐 아니라 민족과 가족, 이웃, 마음이 두 동강 나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슬프고 절망적인 시절이었던 것이다.

소설가 김한창이 3년 만에 펴낸 장편소설 ‘바밀리온(Vermilion‧주홍색)’에서는 관심 밖이 돼 버린 분단의 면면을 사실과 허구를 오가며 풀어낸다. 배경은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 한탄강과 철책선을 코앞에 둔 임진강 유역 최전방 군사지역부터 통독 이전 서독과 프랑스까지다.

반공을 국시 제1로 삼아야했던 남북 대치상황, 동‧서 냉전 시대 서독 지하 간첩들의 대남공작 활동,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실향민들과 주민들의 척박한 인생을 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한 미술학도의 사랑을 통해 보여준다.

주인공 강준혁은 여러 여자를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는데 부인 미경과 화가 지망생 수연, 세희, 채현이 그들이다. 네 명의 여인들은 주인공들의 성격을 보여주는 한편 분단으로 일어난 다양한 사건들을 자연스레 녹여내며, 그 중 세희는 미국 주둔과 그로 인해 빚어진 참상까지 폭넓게 보여준다.

특히 성적 표현과 이미지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이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주홍색’으로 구현된다. 성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과연 적절한 소재인지 의구심을 품을 수도 있으나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여성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성적 관계를 가진 게 개인의 성적 욕망을 표출하는 게 아니라, 이를 분단이 만들어냈다는 필연성을 부여하고 있다.

성만큼 사람을 활력적으로 드러내고 읽는 이의 흥미를 끄는 소재가 없는 것도 또 다른 이유다. 여러 색 중에서도 이 색을 택한 건 성적 결합의 메시지와 둘로 나뉜 현실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어서다. 인간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일종의 낙인인 미국 작가 호손의 작품 ‘주홍글씨’와는 달리 나라가 쪼개진 상황이 초래한 사랑의 좌절을 그려낸 물감인 셈이다.

글쓴이는 “나는 동시대 그 배경 속에 있었다. 장구한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때 그 일들을 허구라는 밀가루에 버무려 병렬했다. 2003년 첫 소설집에 발표한 중단편 ‘접근금지구역’을 개작한 것”이라고 밝혔다.

전주 출생으로 1999년 문예사조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꼬막니’와 ‘솔롱고’, 소설집 ‘평갈의 동굴’을 펴냈으며 전북문화상과 KBS지역대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몽골 울란바타르대학 한국학과 객원교수와 전북소설가협회장을 맡고 있다.

계간문예. 408쪽. 18,000원./이수화기자‧waterflower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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