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화동 가족휴양촌 전경

5월은 가정의 달이다. 봄바람 따라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많은 달이니 만큼, 지역마다 상춘객들로 북적인다.
군 전체 면적의 70% 이상이 산악지형을 이루고 있는 곳이 장수. 물의 고장으로도 불리운다. 장수라는 지명이 말해주고 있듯이 장계, 계남, 계북, 천천, 산서, 번암 등 7개의 읍?면이 하나같이 물과 관련된 지명이다.
금강과 섬진강의 물줄기가 시작되기도 하는 장수로 떠나려면, 대전-통영고속도로 장수IC에서 빠지면 된다. 익산-장수고속도로 장수IC를 이용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 기차는 남원역이나 전주역에서 내린 후 시외버스를 이용하면 갈 수 있다.
울창한 숲 아래,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즐기는 오토캠핑부터 왜란 때에도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는 조선 전기 향교까지.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는 장수 여행으로 이번 봄을 만끽하자. /편집자 주

▲절경과 물줄기 아래 ‘방화동 가족휴양촌’
5월이 지나면, 금방 찾아오는 여름. 요즘 날씨로 치면, 벌써 여름도 훌쩍 다가온 듯하다.
장안산 아래 울창한 숲과 완만하게 ‘S'자를 그리며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방화동 계곡에 조성된 국내 최초의 오토캠핑 전용 가족 휴양촌인 ‘방화동 가족휴양촌’을 만날 수 있다.
오토캠핑장 두 곳과 모험 놀이장, 수변 피크닉장과 3개의 동의 취사장을 가지고 있는 오토캠핑장은 수도시설과 전기시설까지 잘 갖춰져 있어 완벽한 오토캠핑을 즐기기엔 적격이다.
캠핑장 가운데 둥글게 만들어진 잔디밭에서 아이들과 뛰어 놀며 즐기기 까지 하면 금상첨화. 화장실과 샤워장 시설도 최신식으로 갖춰져 있다.
휴양촌 위쪽부터 살펴보자. 장안산에서 흘러내린 덕산계곡이 울창한 원시림과 기암괴석을 품고 절경을 이루고 있다.
가족휴양촌과 함께 자리 잡은 자연휴양림에는 산림문화휴양관, 산막 형태의 숲 속의 집이 있어 캠핑 장비를 갖추지 못한 가족들도 시원한 계곡과 숲 속에서 쉬어갈 수 있다.
방화동 가족휴양촌의 면적은 약 24만 7000㎡에 이른다. 1988년 2월에 조성돼 30여년이 가까이 되었으나 교통이 불편해 숨겨져 있다가 대전?전주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는 후문.
오토캠핑장 2곳, 야영장 3곳, 모험놀이장, 가족놀이장, 체육광장, 전망대 등이 있다. 계곡물이 맑고 차가워 여름휴가와 물놀이 장소로 찾는 사람들이 특히 많다.
장안산 등산이 시작되는 지점이며, 정상까지는 3시간이 걸린다. 인근에 와룡자연휴양림과 동화댐, 장수향교 대성전, 논개 생가 등이 있으니 기억해 두면 좋을 듯.
 
▲아전의 충성스러운 마음 ‘타루비’
전북 장수군 천전면 장판리에는 조선시대의 비인 전북도 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되어 있는 ‘타루비’가 있다.
장판리 앞의 장척애에 있는 순 의리비의 비. 순 의리는 당시 현감 조종면의 수하에 있던 통인(조선시대에 관아에서 잔심부름하던 이속)이었으나, 그 성명은 전하지 않아 누군지 알 수 없다.
조선 숙종 4년(1678년). 그 당시 장수현감 조종면은 아전과 함께 전주감영으로 향하고 있었다. 말을 타고 천전면 장척마을 앞 바위 비탈을 지니고 있을 때, 길가 숲 속에 있던 꿩이 말바굽 소리에 놀라 날아오른다.
푸다닥 요란한 꿩의 날갯짓에 조 현감이 타고 있던 말이 놀라 절벽 아래의 소에 추락하고 말았다. 조 현감은 말과 함께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현감을 모시고 가던 아전은, 자신의 잘못이라 통곡한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고, 바위에 꿩과 말을, 그리고 타루(墮淚) 두 자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현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어 자신도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후, 1802년 장수현감 최수형이 아전의 충성스러운 마음에 감복해 세운 것이 바로 ‘타루비’다. 그 로부터 80년이 지난, 1881년. ‘장수리순의비’가 지역 사람들에 의해 타루비와 나란히 세워졌다.
두 개의 비는 타루각 안에 모셔져 있는데, 지금 바위 앞에는 작은 연못이 만들어져 있지만 옛날에는 절벽 바로 아래로 시내가 흘렀다고 한다.
그림과 타루 글자는 1967년 도로개설 공사를 하면서 없어졌다. 목숨으로 책임을 진 아전에 대해서는 다만 백씨라고 전해지고 있다.

▲왜란 때도 훼손되지 않고 보전되어 온 ‘장수향교’
장수향교는 1407년(태종 7년)에 장수면 선창리에 창건됐지만, 현재 전북 장수군 장수읍 장수리에 위치해 있다. 1686년(숙종 12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된 것.
향교는 1877년(고종 14년)에 현감 홍우정이 중수해 오늘에 이르는데, 왜란 때에도 훼손되지 않고 보존돼 조선 전기 향교를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향교의 입구를 알리는 홍산물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관리사가 있다. 이곳을 더 지나면 오른쪽으로 담을 약간 뒤로 내밀어 쌓은 곳에 정충복비간과 그 뒤로 외삼문이 있다.
정충복비는 장수향교가 왜란 때 소실되지 않고 보전된 연유를 말해주고 있는 자료.
임진왜란 때, 왜장 고비야가와의 부장 안코쿠시가 장수에 침입했을 때, 원노인 정경손이 홀로 향교에 남아 “만약 향교에 들어오려거든, 먼저 내 목을 베고 들라”며 적병의 출입을 막았다.
이에 왜군들도 그의 기개에 감복해 ‘본성역물범(이 성역에는 들어가지 말라)’라는 쪽지를 주고 물러가 왜손 후속 부대의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한다. 장수향교가 전화를 입지 않고 보존된 것은 정경손의 공로였다.
장수향교의 특징 중 하나는, 강학공간이 앞에 있고 제향공간이 뒤에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를 했지만 강학공간은 강당이 앞에 있고, 재사가 뒤에 있는 전당후재의 배치를 한 것.
대성전은 보물 제27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향교 건축의 대표적 건물의 하나에 속한다. 1407년(태종 7년) 지금의 장수읍 선창리에 건축됐으나, 그 뒤 1686년(숙종 12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이로 미루어, 대성전은 조선 전기에 건축돼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짐작할 수 있다.
낮은 석축 기단 위에 세운 맞배집으로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되어 있고, 전면 1칸은 퇴칸을 구성하며 벽체가 없이 트여 있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짜 올린 주심포지만, 공포를 구성하는 부재들은 모두 다포 계통의 모양을 하고 있다. 5성, 송조 4현, 우리나라의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박세린기자?iceblue@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