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흑백사진, 한 사내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한다. 카메라 렌즈를 매섭게 쏘아보는 사내는 ‘녹두장군 전봉준’이다. 우리 근현대사의 여명을 밝힌 동학농민혁명의 불길이 바로 그 눈에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못다 이룬 혁명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기필로 뜻을 이루고 말리라는 기개 넘치는 눈, 그리고 눈빛...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귀를 기울이라

(서울로 가는 전봉준, 안도현)

 

 

122년 전 정읍을 중심으로 한 호남벌을 뜨겁게 달궜던 함성의 흔적을 따라 나선다. 혁명의 불을 댕겼던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입구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에 들러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맞아 최초로 승리를 거둔 황토현전적지를 지나 혁명의 불씨가 된 배들평야를 둘러본다. 4월의 고운 햇살이 골고루 배인 평야는 평화롭고, 평야를 휘돌아 흐르는 동진강 물줄기는 그날처럼 오늘도 유유히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이곳에서 바로 혁명이 시작됐다. 당시 고부군수는 조병갑. 그는 아버지 조규순의 비를 세운다는 명목과 불효죄, 음란죄 등 온갖 구실로 세금을 거둬들이며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특히 혁명의 직접적인 발단은 동진강 만석보. 이미 광산보가 있음에도 불필요한 새로운 보를 막기 위해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해 원성을 샀고, 보를 막은 첫 해에는 수세를 받지 않는다는 약속을 어기고 수세를 징수해 농민들의 삶을 더욱 피폐화시켰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조병갑은 오히려 농민들을 처벌했다. 이에 농민들이 1894년 갑오년 정월 초순 이평면 말목장터에 모여 드디어 봉기하니, 이 최초의 봉기를 기점으로 혁명의 거센 불길이 타오르게 되고 가난한 선비였던 전봉준은 혁명의 중심으로 들어서게 된다.

‘사람이 곧 하늘인 세상’을 꿈꾸며 괭이와 호미 들던 순한 손에 죽창을 세워들고 일어섰던 사람들을 이끌며 새로운 염원했던 전봉준.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에 있는 전봉준 고택(사적 제293호)은 제폭구민(除暴救民)과 척양척왜(斥洋斥倭)의 목소리를 높이며 떨쳐 일어섰던 동학농민군의 최고 지도자 전봉준이 혁명을 일으킨 당시 살던 집이다. ‘녹두장군’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당시 민중의 희망이 되었던 그는 바로 이곳에서 농사일과 서당 훈장을 지내며 가난하게 살았다.

마을 이름 ‘조소(鳥巢)’는 풍수학적으로 새가 보금자리를 틀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붙은 이름이다. 고택은 남향으로 터를 잡고 있는, 평범한 시골의 초가삼간이다. 1974년 보수 당시 ‘무인 2월 26일’이라는 간지가 쓰인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면서 1878년에 세워진 것으로 밝혀졌다.

이 집은 원래 방과 광, 부엌이 각 1칸인 가난한 농민들의 전형적인 가옥 형태였는데 근래에 서편으로 한 칸이 붙여지면서 4칸이 됐다. 현재 모습은 앞서 언급한 1974년 국비와 군비(당시 정읍군)로 수리한 것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안채(초가는 높이 15cm 잡석의 출대 위에 세워졌다. 일반적으로 부엌은 서쪽에 위치하고 이어서 큰방과 윗방이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집은 이 순서를 무시하고 동쪽으로부터 부엌, 큰방, 윗방, 끝방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끝방은 방(房) 보다는 살림살이 등을 넣어두는 헛간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큰방과 윗방은 장지(방과 방 사이의 칸을 막아 끼우는 문)로 되어 있어 필요한 경우 공간으로 터놓을 수 있게 돼 있다.

두 방의 전면에는 퇴를 놓았으며 대살문(산가지를 놓은 모양으로 문살을 짜 만든 문)으로 드나드는 끝방 전면에 반쪽에는 짧은 담을 두르고 이곳에 땔나무 등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부엌의 전?후 벽에는 널문을 달아 필요한 때에는 잠글 수 있도록 돼 있고, 대문의 동편에는 잿간을 겸한 변소가 있으며 출입문으로는 한 짝의 열매문을 달았다. 주위는 흙담이며 짚으로 된 이엉을 덮었다.

 옛 정취 그윽한 흙 담장 너머, 못다 피운 꿈을 뒤로 하고 스러진 그의 안타까운 삶이 덧 입혀진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난 뒤 순창에서 재기를 노리던 그는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1895년 교수형으로 세상을 떴다. 올해는 혁명 122주년, 죽음을 앞두고도 서슬 퍼런 눈빛을 잃지 않았던 그가 남은 이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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