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통치에서 벗어나려면 조선인이 스스로 자각, 깨우쳐서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 기술을 배워서 익히고, 식품과 생산품을 자체 조달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력을 키워야 한다” 인촌(仁村) 김성수(1891-1955)는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개량주의를 주장했다.

정치가, 교육자, 언론인, 기업인, 근대주의 운동가였던 김성수는 고창출생으로 민란과 화적떼를 피해 이주한 부안 줄포에서 자랐다. 자는 판석(判錫), 호는 인촌, 본관은 울산이다.

고창 부안면 인촌리에서 유학자 김인후(金麟厚) 13대손으로 김경중과 장흥 고씨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었던 백부 김기중(金祺中)의 양자가 되었다. 어릴 적 이름은 판석(判錫)이었다.

조부 김요협은 부안면에 집을 짓고 거주했으며 김성수 역시 그곳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김성수는 조부 김요협 내외와 부모 김기준 내외, 생부모 김경중 내외와 함께 살았다. 양가와 생가는 한 마을에 울타리를 하나 두고 있었다. 할아버지 대에 가세를 일으켰지만 조부는 근검절약을 강조하였고 맏손자인 인촌에게도 역시 엄격하게 대했다.

유년기에는 집에서 부모에게 글을 배우고 7세에 비로소 사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소년 판석은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생활이 어려워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을 불러다가 같이 공부하게 하였고 수업료와 지필묵도 사서 나눠 쓰기도 했다.

비교적 어린나이인 13세에 자신보다 다섯 살이 많은 고광석(高光錫)과 결혼했다. 장인 고정주는 임진왜란 때의 의명장 고경명의 후손으로 규정각 제학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이후 인촌은 장인이 설립한 장흥의숙에 입학해 공부했다. 장흥의숙에서는 한문, 영어, 일러, 수학 등 신학문을 가리켰고 장흥의숙에 수학하면서 김성수는 평생 동지인 송진우와 백관수 등을 이곳에서 만났다. 특히 이때 만난 송진우는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평생을 그와 함께 언론, 사회, 정치활동을 함께 하는 정치적 동지가 된다.

청년 김성수는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켜 조국의 자주독립을 이룩해야겠다는 신념 아래 집안 반대를 무릅쓰고 송진우와 함께 동경유학을 결심한다. 송진우와 함께 와세다 대학교 예과(豫科)에 입학해 수학 하던 중 8월 29일 대한제국이 강제로 병합되자 충격을 받은 송진우는 귀국했고 김성수는 홀로 일본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이곳에서 장덕수, 신익희, 안재홍, 김병로 등을 만난다.

이때 인촌은 기업, 학교, 언론 등을 통해 현실적인 힘을 마련하겠다고 다짐하고 구국운동 정략으로 인재배양, 경제자립, 언론창달이라는 목표를 수립한다.

귀국한 김성수는 경영난에 빠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학교장을 지냈다. 안창호의 영향을 받은 그는 교육 계몽활동에 종사하면서 교육과 문화의 힘으로 실력을 키워서 독립을 이룩하자는 ‘실력 양성론’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기업활동에도 관심이 있었던 인촌은 당시 식민치하의 조선백성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품이 유행하던 시절, 민족산업을 일으키기 위한 국내자본 육성계획을 세우고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인수해 경영했으며 이와는 별도로 근대 자본주의적 회사인 ‘경성방직’를 창립한 한국인 최초 방직회사 설립자가 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결을 앞두고 윌슨 미국 대통령이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김성수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송진우에게 중앙학교 학교장직을 넘기면서 동경 유학생들과 비밀리에 독립선언을 준비했으며 이승훈, 한용운, 최암선 등에게 자신의 자택에서 3.1운동을 준비하도록 거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밀정의 밀고로 3.1운동 직후 송진우가 투옥되고 김성수도 체포되었지만 송진우가 관련설을 강하게 부인해 송진우만 1년 7개월 실형을 살고 김성수는 풀려나 교육과 계몽활동, 실력양성에 주력했다.

상하이 임시정부 출범 이후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 익명으로 임정에 후원금을 비밀리에 송금했다. 한번은 그의 서울 자택에 독립단이 찾아와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했다. 그는 대답 없이 자신의 금고 문을 열고 객에게 알린 뒤 자신은 소변을 보고 온다하고는 자리를 비켜 독립단원이 필요한 만큼 자금을 가져갈 수 있게 한 일화도 있으며 김좌진 장군에게 3-4백명의 독립군 무기구매와 훈련 등에 쓰도록 그 당시 황소 백마리를 살 수 있는 1만원 정도의 군자금을 네 차례나 보낸 적도 있다.

일본 언론 활동과 외신 기자들의 출입을 본 그는 국내 언론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20대에 송진우와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발기인 대표로서 창립을 주관했다. 일제의 민간지 발행허가 계획에 따라 창간된 동아일보는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했다고는 하나 식민지시대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기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기독교선교사들의 농촌 계몽운동에 자극을 받은 인촌은 1930년부터 농촌계몽운동 및 문맹자 교화사업에도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원했으며 1931년부터는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을 추진했다.

1932년에는 자금난에 빠진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그해 6월 제10대 교장에 취임했다. 1946년 종합대학 고려대학교로 승격하여 현재의 고려대학교가 되었다. 고려대학교 건물 모양을 듀크대학교 모습에서 영감을 얻고 학교건물을 짓고 손수 나무도 심고 가꾸면서 교육인으로 살고자 했다. 그러나 항일운동의 온상이자 불순언론으로 지목되어 보성전문학교와 동아일보가 총독부 압력으로 경영난에 빠지게 되자 한강철교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김성수는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았고 동아일보는 수시로 폐간을 당하는 등 핍박을 받았다. 1940년 8월 10일 일제가 동아일보를 강제 폐간시키자 인촌은 고향으로 돌아가 1945년 8.15 광복때까지 은둔생활을 했다. 1930년대 후기부터 일제식민지 정책이 민족말살정책으로 펼쳐지면서 한국의 지성인들을 강압적으로 동원하는 과정에서 김성수는 시국강연과 학병제, 징병제를 찬양하는 25편의 논설과 사설을 기고하는 등 친일파 행적을 보인다. 하지만 인촌은 이광수나 서정주와는 달리 창씨개명에 끝까지 거부했고 일제로부터 훈장이나 작위를 받은 경력도 없다.

해방정국에서는 이승만 정권의 제2대 부통령에 취임했으나 이승만의 재선 목적으로 헌법이 개정되면서 부산 정치파동 사건이 터지자 김성수는 이 사건이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이라며 강력하게 반발, 부통령 직을 사퇴했다.

말년에 인촌은 중풍과 심근염 등으로 고생했다. 1955년 2월 18일 서울 계동 자택에서 심금염 등이 악화되어 그의 나이 65세에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장례는 2월 24일 함태영 장의위원장으로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의 장으로 치러졌으며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인촌을 어떠한 독립투쟁 못지않게 우리민족에 공헌했으며 특히 고급인력을 배출해 민적의 내실역량을 키웠고 우리 민족도 근대적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능력을 보여주는 등 민족의 앞날을 이끈 탁월한 스승이자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고창=신동일기자.sdi@

김성수 생가

전라북도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된 인촌 김성수 생가는 남북의 긴 장방형 대지 안에 낮은 담을 경계로 북쪽에 큰집이 있고 남쪽에 작은 집이 있다. 두 집에는 1880년대에 인촌의 할아버지와 양아버지, 아버지가 차례로 지은 안채, 사랑채, 곳간, 행랑채 등 여러 채의 건물이 있어 호남 토호의 집 규모를 보여준다.

인촌은 1891년 작은 집 안채에서 태어났다. 그의 일가는 화적과 귀화(鬼火)를 피하여 1907년에 부안군 줄포면으로 이사하여 살았고 이 집은 1977년에 인촌의 동생 수당 김연수가 옛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고창=신동일기자.s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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