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문학가 "나는 민족의 죄인"

<명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 사실주의 문학의 대가 백릉 채만식 작가> 임태영 기자l승인2016.07.27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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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일제강점기 35년의 식민지하의 역사를 몸소 겪으면서 가난과 투병의 고통스러운 생활고 속에서 평생을 집필에 전념해 소설, 수필, 희곡, 동화 등 1000여편의 작품을 남기고 49세의 일기로 일찍 세상을 마감한 군산 출신 백릉 채만식 작가 추모 65주기를 맞이하는 해이다.
일제 강점기 군산의 암울한 사회 현상과 노동자, 농민 하층민들의 비참한 삶을 과장 없이 객관적 관찰로 사실적으로 묘사한 다수의 작품들을 통해 작가의 문학과 발자취를 찾아가 본다.

▲재주많고 영리했던 유년시설과 가정환경= 채만식작가의 부친 채규섭은 향학열이 남달라 서당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월사금을 내지 못해 번번히 쫒겨나는 처지가 되자 가까운 서당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도둑공부를 했다고 전하여 진다.
또한 채만식작가의 부모님은 근검절약 정신이 남다르고 부지런해 점차 가난을 극복하고 꽤 부유한 가세를 일구었다고 한다. 백릉 채만식 작가는 1902년 6월 임피면 읍내리에서 6남매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으로 마음껏 공부를 하지 못했던 부친은 자식들 만큼은 부족함 없는 학업을 할 수 있도록 집에 독서방을 두고 학업에 매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채만식 작가는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재주많고 영리한 학생으로 임피보통학교와 현 서울중앙고등학교를 거쳐 일본와세다영문과에 유학했지만, 일본 관동대지진과 부친이 미두장에 투기한 미곡이 몽땅 실패하자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더 이상 학업이 어렵게 되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귀국한다.
그는 귀국 후 강화도 소학교에서 1년여 기간동안 교사생활도 했으나 글을 쓰고자 하는 열망으로 교사직을 그만뒀다. 채 작가는 처녀작 ‘과도기’를 냈으나 일본 총독부 검열로 중단되고 이듬해 1924년 ‘새길로’라는 작품으로 이광수 추천에 의해 본격적인 소설작가로 데뷔한다.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계속된 창작열= 채 작가는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조선일보 기자를 거치면서 계속 집필활동을 했다. 불행한 결혼생활과 가난, 혹독한 작품에 대한 일본의 검열 그리고 폐결핵과 싸우면서 오로지 작품에 전념한다.
일제강점기 식민지수탈정책이 심화되는 가운데 가문의 몰락과 함께 힘겨운 가난과 불행한 결혼 생활, 아들의 죽음, 폐결핵에 의한 질병과 싸우며 고통과 좌절속에서도 소설 300여편을 비롯해 수필, 희곡, 동화 등 1000여편의 작품을 집필하는 데에만 평생을 바쳤다.
채만식 작가는 일제식민지하의 군산을 배경으로 고통스런 서민의 삶과 부조리한 사회현상을 생생하게 풍자해 비판하고 고발한 작품 ‘탁류’ 등 군산의 근대역사를 아우르는 수많은 문학작품을 남겨 지역의 우수한 문학작가로 학계와 전문가들로부터 고인의 문학의 천재성과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채 작가에 대한 연구 논문만도 150여편에 이른다.

▲채만식 문학관= 소설 ‘탁류’를 상징하듯 군산시 내흥동에는 채만식 작가를 기념하고 문학을 통한 군산의 근대역사를 재조명하고자 2000년도에 건립한 ‘채만식문학관’ 자리하고 있다. 채만식 작가의 대표적 장편소설 ‘탁류’와 지식인들의 취업난으로 인한 무기력한 현상을 서술한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등 현재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작가의 작품을 다루고 있는 가운데 연간 3만5000여명의 문학계 인사들과 수학여행단이 문학관을 찾고 있다.
▲친일과 반성= 1938년 일본 군국주의 침략전쟁이 세계 제2차 대전으로 치달으며 일본은 문화정책, 조선의 황민화 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지식 문학청년들에 대한 강압정책을 펼쳤다. 징병제도와 증산장려 등 식민지의 정당성에 대한 글을 쓰게 하고 강연을 통한 대중선동에 내몰았다.
채만식 작가도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감옥살이 5개월을 청산하고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는 친일작품을 집필하고 1회의 강연에 나선 전력으로 결국 2002년도 민족문제연구소에 의해 국내 유명 친일작가와 더불어 42인의 친일작가 명단에 기록됐다.
해방 후 고향 임피로 낙향한 후 산지기가 살던 오두막에서 사과 괘짝을 책상삼아 집필에 전념하면서 ‘민족의 죄인’이라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친일을 철저히 반성하기에 이른다.
채 작가는 반성의 작품에서 “남들은 나를 친일한 사람이라고 외면하고 손가락 짓을 하는 것을 보고 지금 자신을 합리화 하고 정당화 시켜 말한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겨운 가난과 싸우며 처자식의 생계를 위해, 쌀 한줌을 얻기 위해 친일의 노예가 되어 추악하고 더러운 짓을 한 민족의 죄인”이라고 밝혔다.
학계 전문가들은 논문에서 채만식 작가는 결벽증이 있고 내성적이며 올곧은 성품을 가진 작가로 친일을 했다는 데 대해 철저히 자신을 반성했으며, 국문학사에서 친일작품을 집필한 작가 중 친일에 대해 반성한 작가는 채만식 작가 한사람 이라고 설명했다.
채만식 작가는 가난으로 인해 장기간 투병중인 폐결핵을 치료도 하지 못한 채 1950년 6월 11일, 6.25발발 2주 전 49세의 짧고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고향 임피면 계남리 야산에 묻혔다.

 


임태영 기자  01765710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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