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조강연 윤덕향 호남문화재연구원장

전북 토착문화, 백제문화 진출 전
서부 평양·동부 산간으로 형성
백제문화, 기층문화 바탕 성장

전북지역 백제문화에 대한 논의는 먼저 백제가 전북지역으로 진출하기 이전 전북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마한세력과의 관계가 어떠했는가에 대한 것을 있을 수 있다.

또 정치적으로 백제에 병합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에도 백제문화가 확인되지 않는 지역에 대한 논의가 있을 수 있다. 특히 분구묘로 대표되는 서부평야지역과 가여분묘와 산성 등으로 대표되는 동부 산간지역의 백제문화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문헌자료가 극히 빈약한 전북지역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익산지역에 자리하고 있는 백제문화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익산이외 지역의 백제유적에 대한 조사는 현재까지는 몇몇 유적을 제외하면 개별적이고 부분적인 것이며 연구활동도 손에 꼽을 수 있다.

고부지역에서는 고부읍성, 은선리 고분군, 지사리 고분군, 운학리 고분군 등이 비교적 일찍 조사됐다.

백제시대에 축조된 고부 석성의 북문지에서는 백제의 지방통치조직인 방성의 하부조직인 상부상항 명문이 있는 인각와가 수습돼 고부읍성이 백제 5방성중 중방성의 치소인 고사부리성임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부안 백산성과 더불어 고사부리성의 영역 내에서 농업 생산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김제 벽골제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백제 지방행정의 중요한 치소였던 고사부리성이 고부지역에 자리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토착집단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익산지역의 예와 마찬가지로 백제 후기의 분묘유적을 제외하고 토착집단의 생활과 분묘유적, 방성으로 기능하던 시기의 생활공간, 방성으로서 관활했을 50개 내외의 성곽과 그 분포 범위에 대해서도 거의 연구된바 없다.

백제 멸망후에 전개된 부흥운동 단계에서 중요한 거점이었던 주류성이 우금산성이라고 한다면 백산성, 기벌포 등이 그와 관련된 유적이고 죽막동 유적이 일본과 중국을 잇는 해상교역의 거점이었다고 한다면 이들 유적의 성격을 고사부리성과 관련해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벽골제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익산지역 왕도의 문화와 고부지역 백제 지방조직의 문화와는 달리 남원 초촌리 일대 백제 고분군은 전북 동부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가야 또는 가야계 집단과 백제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들이다.

백제문화가 진출하기 이전 전북지역의 토착문화는 서부 평야지대의 분구묘와 동부 산간지방의 가야 또는 가야계 고분과 산성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동부 산간지대는 장수를 중심으로 상당한 규모의 가야 집단이 성장했고, 그 세력 거점으로 산성과 고분군, 봉수 유적이 조사되고 있다.

이와 별개로 전북지역과 관련된 많지 않은 문헌 기록 중에는 대동강 지역의 집단이 전북지역으로 이주한 예로 준왕의 남천과 보덕이 경복사를 창건한 기록이 있다. 이 두 기록에 의하면 전북지역은 대동강 지역 집단이 망명한 지역이며 이는 전북지역의 상황이 대동강지역에 알려져 있었고 동시에 전북지방이 망명 집단을 수용하는 문화적 포용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시가는 백제가 멸망하고 300여년후 백제의 부흥을 주창하고 일어선 견훤이 전주를 중심으로 국가의 틀을 갖춘 것도 같은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사례에서 보이는 외래집단이나 외래문화를 전북지역에서 수용한 것은 전북지역 기층문화의 특성에 바탕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익산지역의 백제문화가 부여나 공주지역의 문화와는 거리가 있는 지방문화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백제의 상층문화로서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또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익산지역에서는 보다 많은 백제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고 이들을 활용하기 위한 방안이 적극적으로 모색되고 있다.

백제문화유산만이 아니라 문화유산은 지역공동체나 집단에서 특정한 시점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형성된 공동체나 집단에서 공유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전북지역의 백제 문화가 백제의 진출에 의하여 즉각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형성된 기층문화에 바탕해 성장했고 그 이후의 문화에도 그 특성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제문화만이 아니라 기층문화에 대한 조사와 연구,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백제 시대 전북지역의 문화 양상과 특성에 접근하는 것이 문화유산의 성격과 역사 그리고 활용을 위하여 필요한 요건이고 문헌기록이 영세한 전북지역 백제 문화의 특성과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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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지역 백제 중방성, 지방자치 효시

주제발표 1, 이도학교수(한국전통문화대학교)-전라북도 백제사 어떻게 할 것인가

전북 중심으로 정치지형 재편
익산, 7세기 백제 왕도 위상 확보

우리나라 역사상 전라북도는 의미심장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이 중 익산은 우리 나라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의 남래지로 알려져 있다. 그 사실 여부를 떠나 익산은 우리 나라 청동기 문명의 중심지였음은 분명하다. 그러한 문명 기반 속에서 익산은 마한 목지국(目支國)의 거점이기도 했다. 목지국 진왕(辰王)은 변한 지역 소국 수장 호를 함께 부를 정도로 영향력을 낙동강과 남강유역까지 미쳤다. 진왕을 일컬어 (삼한)三韓의 총왕(總王)이라고 한 평가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마한의 맹주가 소재한 전라북도의 많은 지역이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 백제의 역사 속에 편제됐다. 즉 금강 이남 노령산맥 이북이 백제 영역으로 새로 들어왔다. 그럼으로써 전라북도 지역은 백제의 기본 영역 속에 자리 잡게 됐다. 백제가 남하하여 웅진성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한 이후 전라북도 정읍의 고부 지역에는 중방성(中方城)이 설치되었다. 백제 국토의 중심에 전라북도가 소재했다는 인식의 반영이었다. 백제가 고부 즉 고사부리성(古沙夫里城)에 중방성을 설치한 것은 전라북도 지역 중심으로 정치지형을 새롭게 재편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그러한 선상에서 익산은 7세기대에 접어들어 백제의 왕도로서 위상을 확보했다. 중국의 당과 마찬 가지로 2개의 도성체제 속에서 사비성이 서성(西城)이라면 익산 왕궁평성은 동성(東城)이었다.

백제 역사상 전라북도에는 그러한 도회(都會)가 무려 4곳이나 소재했다. 백제사 속에서 전라북도는 백제의 변방이 아니었다. 오히려 백제의 중심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제는 전라북도가 백제 문화권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는 일이 남았다. 소중한 역사적 자산의 활용에 지혜와 중지를 모아야할 때가 됐다.

마지막으로 본 세미나의 주제인 전라북도에서의 백제사 연구의 문제점을 짚어 본다. 전라북도하면 백제사의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공간적 격절감에서 비롯된 변방 심리가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해 주었다. 일례만 든다면 정읍시 고부에 설치된 중방성의 존재는 전라북도가 백제사의 중심지임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익산 왕도론은 오랫동안 부정되어 왔다. 그러한 부정론의 기저에는 백제는 허약하고 왕권 역시 미약하다는 심리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익산에는 충남 부여를 제외하고는 왕도였던 공주나 백제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국가 최대의 미륵사와 왕실 사찰 재석사가 소재했다. 이로 볼 때 익산은 범상하지 않은 지역임을 간파했어야 마땅하다. 더욱이 미래불과 연관된 거대한 미륵사와 궁성의 존재는 사비도성 다음 시대의 도성임을 감지하게 한다. 그럼에도 어떻게 별궁(別宮)이니 행궁(行宮)이니 하는 개념 이해도 제대로 되지 못한 용어들이 구사되었는지? 의아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본질은 백제에 대한 편견에서 야기된 위장된 신중론에 다름 아니라고 본다.

후백제 진훤왕이 광주에서 전주로 천도하게 된 직접적인 요인은 이곳이 백제의 본류인데서 기인하였다. 백제고지에 유일하게 설치된 남원경의 존재도 이 사실을 어느 정도 뒷받침해준다. 따라서 이제 전라북도는 백제의 중원이라는 의식의 확립이 긴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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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1, 김주성교수(전주교육대학교) 전라북도 백제사 어떻게 할 것인가 토론

지형적 특성 생활에 직접 영향
동학이념 등 역사의식도 형성

1. 전라북도는 서쪽으로는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산악지대로 구성되어 있는 ‘산과 들의 이중주’를 이루고 있는 지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지형적인 특성은 사람들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일찍부터 평야지대에는 벽골제가 만들어져 농경이 발달하였으며, 경기·충청·전라도와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동쪽 산악지대는 영남지방과의 교류를 제약하게 되었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가 동쪽 산악지대인 가야를 사이에 두고 대립하다가, 6세기 중반 가야의 멸망으로 백제와 신라가 직접 국경을 마주하고 대립하게 되었다. 혹시 이런 지형적인 영향이 백제사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백제시대 전북지방에는 어떤 요소로 작용했을까요.

2. 전북인들의 역사의식 형성에 상당히 작용하고 있는 요소로 백제의 일원이었다는 점과 함께 동학이념의 실천장이었다는 것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역사의식의 형성은 정체성 확립과 자긍심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바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역사의식의 형성은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경우가 많다. 현실에서 역사의식 형성에 도움을 주기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3. 익산의 미륵사와 왕궁리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입니다. 이 유산을 잘 보호하고 연구·관리하여 후손에게 물려주는 중차대한 임무도 우리에게 남아있는 중요한 의무입니다. 이와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활용의 측면입니다. 유산의 활용을 통한 수익창출입니다. 미륵사와 왕궁리 유적에는 탑만 하나씩 덩그라니 남아있습니다. 이를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 고견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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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동부 '철'-서부 '소금' 교류

주제2, 곽장근교수(군산대)-전라북도 백제와 가야의 교섭

전북 철기문화 바닷길로 전래
소금 유통으로 해양문화 번성

제나라 전횡의 망명과 고조선 마지막 왕 준왕의 남래로 전북에서 ‘동철서염(東鐵西鹽)’의 기틀이 마련된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전북의 철기문화가 육로가 아닌 바닷길로 전래된 것으로 추론하였는데, 당시의 바닷길을 전북의 아이언로드로 설정하였다. 초기철기시대 때 만경강유역이 당시 테크노밸리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횡의 망명과 준왕의 남래가 결정적인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 해양문화가 가장 융성함으로써 마한의 지배층 무덤으로 밝혀진 말무덤과 해양활동의 증거인 패총이 가장 밀집 분포되어 있다. 이제까지 학계에 보고된 600여 개소의 패총 중 200여 개소의 패총이 새만금에 자리하고 있다. 금강·만경강·동진강 내륙수로와 바닷길로 군산에서 생산된 소금이 널리 유통됨으로써 해양문화가 더욱 번성할 수 있었다.

삼국시대 때 마한의 해양문화와 철기문화의 생산체계가 그대로 계승되었다. 초기철기시대 장수 남양리, 지리산 달궁계곡에서 처음 시작된 철기문화가 전북 동부지역에 기반을 둔 가야세력이 가야계 소국으로까지 발전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백두대간과 금남호남정맥 사이 진안고원의 장수군에 터전을 둔 장수가야는 5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등장해 가야계 소국으로 발전하다가 6세기 초엽 경 백제에 복속되었다. 금남호남정맥이 백제의 동쪽 진출을 막았고, 내륙교통망의 인후지지와 같은 월성치·육십령·수분령의 장악, 대규모 구리와 철의 산지, 한성기 백제의 간선교통로가 통과하지 않는 지정학적인 이점도 크게 작용하였다.

전북 동부지역에 큰 관심을 두었던 백제의 왕들은 백제를 중흥으로 이끌었다. 백제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은 운봉고원을 통과하는 백두대간 치재로를 따라 남정하여 가야 7국을 평정하고 운봉고원의 니켈철로 칠지도를 만들어 왜왕에게 보낸 것으로 보았다. 전북의 ‘동철서염(東鐵西鹽)’을 국가시스템으로 처음 기획하고 구축했던 무왕은 전북 동부지역 철산지에 큰 관심을 두었는데, 백두대간 아막성에서 20년 넘게 지속된 철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운봉고원을 탈환한 뒤 이를 발판으로 익산 미륵사와 제석사, 왕궁 등 대규모 국책사업을 추진하였다. 한성기부터 줄곧 지속된 전북가야와 백제의 돈독한 교류관계가 무령왕 때 종료되었고, 무왕의 운봉고원 탈환으로 백제가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장수 남양리에서 시작된 철산개발이 후백제까지 계속된 것으로 추론하였다. 백제의 남방성과 통일신라 때 남원경이 남원에 설치되면서 전북 동부지역의 역사적인 위상을 최고로 높였다.

후백제가 멸망하자 장수가야와 백제, 후백제의 국가 발전을 주도했던 철산개발이 중단되었고, 급기야 지방행정체계도 군에서 현으로 강등되었다. 진안고원은 후백제의 멸망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낙후된 지역을 암시하는 무진장으로만 회자되고 있다. 고려 태조 23년(940) 남원부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후백제가 멸망하자 철산지인 운봉고원을 남원부에 편입시켜 철산개발을 중단시키고 국가 차원의 통제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고려의 국가전략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전북 동부지역에서 발견된 80여 개소의 제철유적이 문헌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요인이 되었다. 전북가야와 백제 교섭의 역동성이 담긴 전북 동부지역 제철유적 발굴조사를 통해 더 심층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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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2, 김재홍교수(국민대학교)- 전라북도 백제와 가야의 교섭 토론

기원전 2~1세기 경 철기문화
전주 주변 전북 가장 발달해

1. ‘동철서염(東鐵西鹽)’, 한마디로 전북 고대문화의 원동력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지금까지 전북 고대문화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고대문화의 물질적인 기반에 대한 논의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백제가 전북 서해안을 장악하고 이 지역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바다로 진출하는 통로라는 의미도 있지만 소금이라는 물적 기반을 장악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면 이 발표문의 논지가 더 잘 드러날 것입니다.

2. 기원전 2-1세기경에 가장 철기문화가 발달한 곳이 전주 주변의 전북이며, 당시 마한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발표문에서는 만경강유역에 기반을 둔 선진세력에 의해 장수 남양리, 달궁계곡 등 전북 동부지역의 제철유적이 본격 개발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어 만경강유역을 중심지로 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 당시 마한의 여러 지역(소국) 중에서 철기문화의 중심지는 어디이며, 만경강유역의 초기철기시대의 철기는 철산지인 남원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3. 운봉고원의 철산 개발은 마한 시기에는 만경강유역의 선진세력, 백제 시기에는 백제 중앙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백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에도 기문국을 가야계 소국으로 설정한 것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철산 개발에서 운봉고원의 가야인 기문국의 역할은 무엇이며, 백제(마한)와의 정치적인 관계는 어떻게 설정할 수 있습니까.

4. 발표문에서 시종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전북(백제)의 고대문화가 융성하는 시기에는 군산, 익산 등 해안지대의 소금(鹽)과 남원, 장수 등 산악지대의 쇠(鐵)이 국가시스템 속에서 기능을 발휘한 때로 보고 있습니다.

6세기 이후 운봉고원은 기문 → 백제 → 신라 → 백제 등으로 정치체가 급격하게 변동될 정도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므로 철산지에서 철기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신라의 협력과 양해가 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장병운 기자  arg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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