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던 노래를 다시금 흥얼거리고 밑줄 그으며 되뇄던 낡은 책 속 글귀가 궁금해질 때, 비로소 가을이다. 독서의 계절을 맞아 출간된 다채로운 시집들이 하루하루를 살아내느라 미처 들여다보지 못한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

전 전북문인협회장 정군수는 신아문예대학 문창과와 전주교도소 독서동아리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틈틈이 써 내려간 작품들을 한데 엮었다. 제5집 ‘초록배추 애벌레(인간과문학사)’는 평소처럼 소소한 자연물과 일상에서의 경험을 소재로 택했으나 사유와 기법만큼은 오롯이 그의 것이다.

표제시 ‘초록배추 애벌레’에서는 ‘초록만 먹고 자란/초록배추애벌레가 장하여/제 새끼인 줄 알아/포기에 감싸고 살았다/다 자란 애벌레가 초록을 벗고/흰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아갈 때/그 때도 가물가물 초록나비인 줄 알았다’면서 품 안의 자식이 부모의 사랑과 헌신으로 성장했지만 그들의 뜻과는 거리가 먼, 그들과는 다른 길을 가는 씁쓸하고도 당연한 인생사를 보여준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드는 생각들, 어린 시절 추억, 고독과 그리움 같은 여러 정서들, 삶을 살아가는 자세, 손자에게 남기는 가르침 등 다양한 이야깃거리들도 담았다. 뒤편에는 전작 ‘늙은 느티나무에게(2013)’ 관련해 해설을 달았다.

한 발 느린 서평은 시는 시대로, 작가의 소회는 소회대로 누려주길 바라는 글쓴이의 바람 같다. 김제 출생으로 전북대 국문학과와 원광대 교육대학원 한문학과를 졸업했다. 중고교 국어교사로 근무하다 정년퇴직했으며 시인으로는 계간 시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전주문인협회 부회장인 안 영의 ‘시간을 줍다(계간문예)’는 1997년 문예사조 수필로 등단, 수필가로 활동하다가 2011년 한국문학예술을 통해 뒤늦게 시인이 된 후 써내려간 첫 시집이다.

누군가는 수필가로서의 자존심이 없다 내지 시인은 아니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수필로 다할 수 없는 서정을 시로, 시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수필로 구현하는 천생 글장이일 뿐이라고. 맑고 아름다운 정서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도 전하고자 하는 바를 잊지 않는다.

가령 ‘바다’에서는 잔잔히 일렁이는 물결을 ‘조잘조잘 은빛 모국어의 언어’로 형상화하는가 하면 바다, 바람, 거룻배, 노을 등 어휘들을 통해 사랑이 싹텄다 지는 과정을 드러낸다. ‘백합화’에서는 ‘이 땅에 내린 하느님 은총으로/사랑이 굽이쳐서/은하까지 닿는 밀어/화알짝 열리는 쌍백합’이라며 하늘에서 내려 백합으로 살다 돌아가는 여정을 곱디곱게 그리는 한편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연상케 한다.

김제 출생으로 현재 노송복지관에서 시낭송을 지도하고 있으며 수필집으로는 ‘내 안에 숨겨진 바다’가 있다.

나루문학 회장인 백승연의 세 번째 시집 ‘물거울(신아출판사)’은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음에도 외롭고 슬프고 쓸쓸하고 버림받고 억울한 이들을 어루만진다. 따스한 말을 전하는 대신 눈높이를 맞춰 더 큰 위로를 전하고 있다.

‘사월의 미망-돌아온 4월 19일에’에서는 ‘이름 없이 스러져 간 그대들의 영혼이/강바닥을 긁듯 강기슭 운무에 휩싸여…산화한 사월/이름 모를 그대여!/천국의 계단을 오르는 그대여!//’라며 4.19 당시 스러져 간 귀한 영혼들을 되새긴다.

‘저녁 길’에는 지는 해를 뒤따라 바삐 집으로 돌아가고자 시내버스에 뛰어오르는, 교통카드에 하루를 찍는 평범한 소시민들의 일상이 등장한다. 뒤늦게 버스에서 내려 헌 점퍼를 걸친 아저씨, 아웃도어 차림의 아줌마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모습은 오늘 나의 퇴근길이다.

동양문학 추천으로 등단했으며 저서로는 ‘겨울잠행’ ‘바람의 뒷모습’이 있다./이수화기자‧waterflower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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