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식(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20일 검찰의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결과 발표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해외언론에서도 대단히 높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미국의 어느 한 방송에서는 이처럼 ‘기괴한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진행자의 질문에 해설자가 진땀을 빼는 장면도 있었다. 우리들이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이 일이 그들의 눈에 ‘기괴하게’ 비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왜, 어떻게 하여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일까?
  유럽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자립한 개인’을 그 전제로 하고 있다. 이것을 풀어서 설명하면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하고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가 될 것이다. 이렇게 ‘자립한 개인’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때에 비로소 자기 자신에 관한 일은 물론 사물에 대한 객관화가 가능하고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대화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를 갖게 된다. 요즈음 우리 사회의 큰 화두가 되어 있는 헌법도 다름 아닌 이 ‘자립한 개인’을 확보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즉, ‘자유와 재산’으로 표현되는 기본권과 이를 보장하기 위한 삼권분립을 전제로 하는 통치구조에 관한 규정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립한 개인’은 위와 같은 헌법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확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유럽에서 거의 천년에 걸쳐 형성된 이 이념을 이성적인 결단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 아직 충분히 천착하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근대 이후 한국사회가 국가주도에 의해서 이끌려오고 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한국사회는 일제 식민지 시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서 오늘에 이르기 까지 국가의 주도로 형성되어 왔다. 즉, 빠른 성장을 이유로 경제활동과 정치생활 등 공적인 영역에서는 물론 사적(私的)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적극적인 간섭이 있었다. 이처럼 국가가 개인의 영역에 조직적으로 개입해온 결과 우리는 자신이 주체가 되는 삶을 꾸려나가기 보다는 외부의 강자(=국가)가 정해주는 일을 수동적으로 처리하는 삶, 즉 주어진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국가주도의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개성이 존중되지 않고 ‘개인’은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왜소해진 ‘개인’은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과 내면의 소리에 바탕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권력자의 의중을 가늠하여 눈치껏 살아가는 부유(浮游)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결국, 이러한 사회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이 발달할 뿐 자신의 개성과 생각에 바탕한 자신 있고 당당한 삶은 어렵게 된다.
  이 글을 통하여 대통령 주변에 그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사태를 가져온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은 어느 정도 제시되었다고 본다. 개인이 약한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뿌리를 내리기는 매우 어렵다. ‘국가주도에 의한 사회’의 공과(功過)가 충분히 드러난 지금 우리가 선택해야할 길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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