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도 못할 만큼 괴로웠습니다. 한지로 부귀공명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물론이고 딸과 손녀들도 한사코 말렸습니다. 하지만 ‘전주에 한지 공예 뿌리를 키운 어른으로서 개인적으로 서운하겠지만 대승적으로 수용해달라’는 주위의 권유를 마냥 모르는 채 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앞길을 막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도 컸습니다.”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 60호 색지장(전지)으로 지정받은 김혜미자(76)는 무형문화재 지정을 둘러싸고 지난해 가을부터 벌어졌던 일련의 일들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특히 한지를 다루는 사람은 기능보다 인성이 중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한지가 지닌 물성자체가 더할 수 없이 높고 순수한 존재입니다. 한지는 99번의 손길을 거쳐 비로소 100번의 정성이 닿아야 만들어지기에 백지라고도 합니다. 욕심 때문에 있는 것들을 부정하면 안됩니다. 한지공예는 단순한 기능이 아닙니다. 어른과 아랫사람을 알아보고, 설자리와 앉을 자리를 가릴 수 있는 마음자세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지의 ‘지고지순’함을 다루는 사람은 마음도 그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형문화재의 무게는 한 분야에서 최소 20년 이상 노력한 사람들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한지도 마찬가지. 그는 평소 제자들에게 10년 동안 다양한 기술을 습득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으로 20년은 넘어야 비로소 개인의 색깔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현재 대학 교수인 제자들에게도 이런 기준은 마찬가지다.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 겸손하고 꾸준한 모습을 보일 때 인격도 함께 인정받는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는 전주한지공예의 산 증인이다. 1992년 암 수술을 받은 그는 1993년 20점의 한지공예 작품으로 첫 전시회를 열면서 전주 한지공예의 지평을 열었다. 이 전시를 계기로 전주예총이 1995년 풍남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제1회 전주한지공예대전을 만들었고 이때부터 전주한지공예가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가 걸어온 길이 바로 전주한지공예의 길인 것이다. 이번 문화재 지정을 둘러싼 아픔을 당사자가 아닌 전주한지공예를 책임져야 하는 어른 입장에서 고민을 거듭한 이유다. 
  전국의 민속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전시된 유물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알아보며 작품을 만들었던 그의 기억은 이제 한지공예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향해야 할지에 닿아있다. 여러 공예 대전에서 부피가 큰 옷장 등 한지 가구로 많은 상을 받아왔던 그는 이제 과감히 그 틀을 버린다. 
  “본래 한지공예는 세간살이였어요. 그냥 반짇고리같이. 그러던 것이 공모전이 생기고  120×180 사이즈가 나오면서 장롱을 출품해야만 대상을 받는 실정이 됐습니다. 물론 내 탓도 있지요. 그래서 선조들이 쓰던 생활공예작품으로만 전시한 번 하고 싶어요. 올해 말이나 내년 안에.”
  그에게 또 하나 큰 계획이 있다. 문화재 실사를 받는 동안 심사위원들이 던진 질문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 오랜 활동기간동안 저서가 없느냐? 책임감을 안 느끼냐’는 질문이었다. 가슴이 아팠다는 그의 숙원은 바로 제대로 된 한지공예 책을 만드는 것이다. 전문가에서 초등학생도 볼 수 있는 교재를. 또 하나 한지공예를 배우고 있는 딸과 손녀와 함께 한지 족두리를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다. 생전에 꼭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으로 멋진 작품으로 대를 이어가고 싶어 한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전주한지공예가 문화재로 등재됐으니 이제 지화(어사화 등), 지호(그릇) 분야도 문화재로 포함돼서 전주, 전북이 명실공히 대한민국 한지공예 구심점으로 우뚝 서기를 기대합니다. 제 남은 시간도 여기에 받쳐 전주한지공예의 이름을 빛내는데 일조하겠습니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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