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예술을 가까이 하지 않고도 사는 데는 별문제가 없다. 어떻게 보면 사치여서 의식주 충족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다. 그래서 예술을 가까이 하고 즐기는 계층은 그리 두텁지 않다. 하루 먹고 사는데 바쁜 이들이 꽤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예술을 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사람답게 사는 데는 예술이 필수적이 된다. 예술을 생활화하면 정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훨씬 고양된 삶을 누릴 수 있다. 아무리 생활에 쫓긴다 해도 예술이 빠진 삶은 황폐하다고 하겠다.
  그래서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이 논리적 타당성을 갖게 된다. 정부든 기업이든 개인이든 간에 이 분야에 지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선 개인은 어떤 대의명분 보다는 개인적 친분이나 취향에 따라 돈을 내놓는다. 개인적 관심사나 즐거움 때문이다. 기업의 경우는 좀 다르다. 기업 이익의 사회적 환원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 투자라는 시각도 있다.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은 기업 이미지 제고를 비롯해 사회 공헌과 고객 만족이라는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정부의 문화정책도 공공성이라는 차원서 접근이 가능하다. 중앙정부나 지자체는 시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기꺼이 재정을 투입한다. 역사적으로 근대 서구 여러 나라들은 종교기관이나 귀족들이 해오던 패트론 즉 후원자 역할을 정부가 맡았다.
  유럽의 경우 프랑스나 독일, 네덜란드 등은 직접 문화예술단체를 지원한다. 영국은 권역별로 예술 진흥원 형태의 전문 기구를 설치하고 사업을 운영한다. 다만 미국은 정부가 직접 나서는 것보다 기업 등 민간 차원서 문화예술을 뒷받침하는 게 상례다.
  최근 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 문화예술진흥기금이 곧 바닥을 드러낼 것이라고 한다. 올 연말에는 442억 원으로 쪼그라들고 다시 2018년에는 아예 잔고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지난 2004년 모두 5273억 원에 달했던 데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다. 그 이유는 공연장 입장료 등에 부과되던 모금 방식이 위헌 결정이 내려진데다 정부 재정의 출연이 거의 없는 탓이라고 한다. 그간 기금이 해오던 역할을 염두에 둔다면 그냥 넘길 상황이 아닌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현대적 형태의 문화예술지원 정책이 마련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개인이나 기업의 지원이 미미한 처지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해진 반면 정부나 공공기관의 역할은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문화예술진흥기금이 바닥을 드러내도록 방치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정부 차원서 여러 가지 대책들을 강구하고 있다니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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