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떠나 있는 동안 나는, 여러 번의 생애를 살았다. 그러나 뜬눈으로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시시때때로 짓는 크고 작은 죄를 직시하지 못한 채 세월이 갔다. 사람 속에 있었으나 고독했고, 사람 속에 머물렀으나 신산했다.’(‘누에의 집’ 28p)
  봄은 매화 향기와 함께 온다. 짙은 기다림의 정취다. 부안 출신 김이흔(본명 김형미) 시인이 세 번째 책 <누에 nu-e>(교음사)를 내었다. 부안의 명물 ‘누에’에 관한 글로 완주공동문화창조공간 ‘누에’에서 발상을 얻었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누에를 쳤던 그는 직접 에세이 내용에 맞추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독창성 있는 독특한 그림과 함께 동화적인 느낌으로 ‘진짜 자신의 눈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을 읽는 이들과 다 같이 겪으며 간다. 
  누에에 대한 공부가 깊다. 한 가지에 깊이 몰두하고 연구하여 사물의 이치를 알고자 노력한 ‘격물치지’의 자세가 돋보인다. 누에의 신 누조는 ‘신옹씨의 딸이자 황제 헌원의 부인’이었고, ‘하늘의 중심인 자미원의 주인이 누조’였으며 ‘조선시대 왕비의 천잠례는 여성 노동을 상징’이라는 사실을 적시한다. 또 ‘누에 혈로 이루어진 산이나 누에섬, 잠두봉처럼 누에와 관련 된 것이 많’고 ‘움직이는 모든 사람들이 뽕잎 갉아먹는 소리를 낸다’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놓치지 않는다.
  그렇게 끌어올린 내면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뽕잎을 먹다가 자고, 일어나 또 먹고 자던 그 세월을 모두 잊고 어둠속으로 들어간다. 더 진화된 나, 더 큰 나로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기 위해.’ 그렇기 때문에 쉽게 읽히면서도 감동의 파장이 강렬하다.
  에세이집에는 누조에 관한 내용부터 누에를 기르는 잠모, 날 수 있을 때까지 누에가 부르는 노래에 이르기까지 총 11부로 나뉘어져 실려 있다. 그가 세 번째에 와서 시집보다 더 시집다운 에세이집을 선보일 수 잇었던 것은 17년이라는 시인의 여정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000년 ‘진주신문’과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과 함께 2003년 ‘문학사상’ 시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작가회의 및 시인협회와 문인협회 등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산 밖의 산으로 가는 길>, <오동꽃 피기 전>이 있다. <오동꽃 피기 전>은 2011년 ‘불꽃문화상’을 수상한 이후 불교와 동양철학에 심취해 오랫동안 고향을 떠나 있다가 맺게 된 또하나의 열매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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