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상아탑이라고 부르는 데는 연유가 있다. 19세기 프랑스 평론가 생트뵈브가 시인이자 극작가인 알프레드 비니를 상아탑에서 산다고 비유했다. 비니는 고독감과 정치적 환멸 등으로 인해 현실에 염증을 느꼈다. 그래서 세속적 생활에는 관심을 끄고 집에 틀어 박혔다. 오로지 예술지상주의 입장에서 홀로 작품을 발표하며 지냈다. 평론가 생트뵈브는 이런 생활을 상아탑이라고 부른 것이다. 이 용어가 나중에는 대학 또는 대학의 연구실을 지칭하는 말로 전용됐다.

이처럼 대학은 한 동안 현실과는 담을 쌓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매진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야스퍼스도 “대학은 그 성격에 있어 소크라테스적이며 자유라는 목표를 향한 형성과정”이라고 규정한 뒤 그것은 대학의 지적 생활에 참여함으로써 행해진다고 했다. 교양, 학문의 자유, 고고함 등이 연상되는 게 바로 대학이었다.

변화가 왔다. 대학의 기능 중 사회봉사가 추가된 것이다. 19세기 후반 미국 대학에서는 대학이 속한 지역사회의 요구와 필요에 부응해야 한다는 흐름이 나타났다. 이후 대학이 어떻게 사회에 기여해야 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됐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학은 과연 이런 기능들을 충실히 해왔느냐에 대한 논쟁들이 뜨겁다. 학령 인구 감소와 4차 산업 혁명 등 급변하는 주변 환경 때문에 대학들은 생존을 향한 무한경쟁에 돌입했다. 따라서 연구과 교육, 봉사는 뒷전이라는 지적이다. 대학은 이제 취업학원에 불과하며 교양인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취업준비생을 양산하는 데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운영도 기업경영 마인드가 도입되면서 교육 현장이 완전히 시장속이 되어간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런 와중에 청소년 2명 중 1명은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대학에 간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통계청이 얼마 전 발표한 ‘2017 청소년 통계’에 의하면 13-24세 청소년의 51%가 좋은 직업을 가지려고 대학 이상의 교육을 받는다고 답변했다. 2년 전보다 2.5%포인트 상승한 숫자다. 인격이나 교양을 쌓기 위해서는 불과 2.7%에 그쳤다. 한 마디로 대학을 취업학원으로 여기는 인식이다.

이 시대에 대학이 상아탑으로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오로지 졸업생 취업만이 지상 목표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잘못된 방향이다. 학교와 학생 모두가 이런 식의 사고방식을 갖는다면 대학의 존재이유가 희미해진다. 아무리 적자생존의 살벌한 상황이라지만 야스퍼스 말대로 소크라테스적인 면모를 잃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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