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이후 서양음악을 받아들였던 지식인들은 서양음악을 우리와 관습적 차이를 갖은 ‘문화’로서 바라 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따라 배워야 할 ‘발전된 문명’ 또는 ‘선진화된 기술’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우리는 전통 음악적 세계관과 음악양식은 열등한 것으로 부정당함으로써 자생적 근대화의 길은 막히고 ‘근대화’란 곧 ‘서구화’를 의미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로부터 수입한 근대성 역시 그 것을 낳게 한 ‘봉건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진보적 측면은 배제된 채 음악의 텍스트만 표피적으로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경우 전통과 근대의 충돌과 갈등은 음악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서양음악은 어떻게, 누구에 의해 수용되었으며 그 결과 음악사회는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되었고 어떤 문제점을 낳았는지, 또한 전통음악은 근대화 과정에서 어떤 문제를 안고 축소되고 변모되어 왔는지를 우선 재조명 해 봄으로써 의문점이 풀릴 것으로 믿는다.
 서양음악 최초의 유입과정을 살펴보면 첫째, 실학자들에 의한 서구 음악에 대한 견문과 이론의 소개. 둘째, 천주교의 전파에 따른 찬송가. 셋째, 미국 개신교의 찬송가 전파와 학교 교육. 넷째, 군악대의 창설 등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서양음악에 일반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전해지고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들어 개신교 교회와 학교를 통한 찬송가와 창가 교육을 통해서 전파 되었다. 최초로 불려 진 서양음악은 “예수 사랑하심”과 같은 찬송가로서 이후에도 우리나라 서양음악사는 교회를 떠나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찬송가와 교회문화는 전문적인 양악인 배출과 일반인들에 대한 양악 감수성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개신교보다 100년 먼저 들어온 천주교에서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받아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에서 전통 민요선율에 성서내용의 가사를 얹어 부르는 시도를 하였으나 개신교 교회의 찬송가에서는 한국 전통음악어법과 만나려는 시도는 하였으나 모두 좌절되고 말았다. 예컨대 김형준이란 음악가는 서투르게 구미식 찬송가를 부르기보다는 동일한 가사를 조선식 곡조에 도입하자라는 주장을 하였지만 여지없이 비판당하고 말았다. 즉, 조선식 곡조는 “요정과 놀이터 같은 장소에서나 부를 것이지 신성한 교회당에서는 절대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천주교의 음악문화는 교회 자체에만 영향력을 갖는 것이지만 개신교의 경우에는 근대적 교육기관의 양성을 주도하면서 학교에서 찬송가와 창가를 가르쳤기 때문에 개신교에서 전통음악을 천하게 여기고 배제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울러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문화말살정책을 펼친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으로 공교육현장에서 우리의 전통음악 교육이 배제되고 서양음악과 일본의 창가 위주의 음악교육이 이루어진 시대적 상황으로 인하여 일반 국민의 음악적 감수성을 서구음악으로 일반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다른 한편 군악대 창설에 의한 기악 합주음악이 도입되는데 이는 정부에 의해 주도 되었다. 1881년 조선 정부는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신식군대 별기군을 창설하여 군제 개혁을 감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궁정의 군악대는 기존의 전통악기 나발대신에 서양악기인 나팔로 신호체제를 확립하였다. 군악대를 통한 서양음악의 유입이 국가에 의해 군대에서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은 서양음악이 ‘부국강병의 음악으로서 힘을 가진 음악’이란 의미체계로 전 조선사회에 소통되는 발판이 마련된 것임을 의미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서양음악의 최초 유입과정과 함께 정착과정에서 누가 이를 주도적으로 받아들이고 어떤 경로로 이루어졌는가에 관한 문제인데 서양음악을 수입했던 주체세력은 정부, 기독교 집단, 일본제국주의, 그리고 학교와 각종 사회단체를 통해 계몽운동을 주도한 지식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과 지식인을 비롯하여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에게는 교육자강이나 구국 운동적 차원에서 ‘신’(新)은 양악이었고 ‘구’(舊)는 고유의 전통음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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