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점리 고분 주인은 5C 백제 지배계층이었다

<전북백제 후백제 재발견> 부여 · 공주에 이르는 물길 입구 남쪽 익산 · 김제 통치 요충지 특별취재반l승인2017.05.03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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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시차를 두고 나타난 익산 웅포 입점리 고분군은 백제역사의 물줄기 속 큰 물음표로 인식돼 왔었다. 과연 무덤 속 주인공은 누구이며 그들은 왜 그 곳에서 15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잠들어 있었을까.

이 고분군은 당대 최고의 사기로 알려진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거론되지 않았던 그야말로 '공백의 역사' 비어있는 페이지였다.

1986년 새터 마을에 사는 한 학생이 칡을 캐다가 금동제 모자의 발견으로 알려지게 된 입점리 고분은 해발 240m의 함라산에서 금강변을 따라 뻗어 내린 산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바로 그 해 8기의 고분을 조사했고, 2년 뒤에는 사적 제347호로 지정된 이 지역에 대한 정비를 위해 주변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13기의 고분을 더 발견해 합계 21기의 고분이 확인됐다.

이 중 백제고분은 19기로 확인됐다.
백제고분 19기는 구덩식돌덧널무덤 11기, 앞트기식돌덧널무덤 1기, 굴식돌방무덤 7기로 분류된다.
무덤 축조시기는 5세기말에서 6세기초 인 것으로 추정된다. 입점리고분이 공주시대 고분과 똑같은 축조양식을 갖춘 것은 이 지역이 백제 중기의 정치적-문화적 중심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이렇게 발굴된 입점리 고분군은 백제 중기부터 후기의 도성지였던 공주나 부여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완전한 형태의 백제 중기시대 고분과 금동제장신구류와 금동제신발 등 당시 지배층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이 발견됨으로써 이 고분군이 5세기때 이 지역의 귀족층들의 무덤인 것이 유력해진다.
고분군 대부분은 외형의 봉토 밑지름 약 15m, 높이 약 2m이다. 발굴조사 결과 풍화된 암반을 경사면에서 ‘ㄴ’자 형태로 따내고 석실을 쌓아 만들었는데, 네 벽은 자연 산돌을 사용, 편평한 면을 고르게 맞추어 쌓아올리면서 80∼90㎝ 높이까지는 수직으로, 그 위로는 네벽을 맞죄어 이른바 궁륭형의 천장을 만들어 천장돌로 30∼40㎝ 크기의 뚜껑돌 4개로 덮었다.


고분 입구에서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널길은 동벽에 붙여서 남쪽으로 마련되고 널길입구 밖으로 너비 13∼15㎝의 배수로가 340㎝까지 뻗쳐 있다. 널방의 크기는 268×240×240㎝이며, 널길은 158×85×116㎝이다.
유해의 머리방향은 무녕왕릉과 같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금동관과 금동관모는 남쪽에, 금동신은 북벽쪽에 놓여 있다.


발굴조사 당시 출토된 유물로서는 금동제장신구류·금동제신발·말재갈·철제발걸이·토기·중국산청자항아리·화살통장식·금귀걸이·유리구슬 등이 있다.


특히, 보존 상태가 양호한 제1호 고분은 귀족(왕족, 지배층)의 고분양식인 굴식 돌방형이다. 여기에는 금동관모, 금동신발, 말재갈, 은제말띠, 중국청자 네귀단지 등 지역에서 기존에 확인되지 않았던 귀중한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금동관모와 신발은 최고의 정치적 상징물이자 백제 통치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금동관모는 반원형 금동판을 좌우에서 붙이고 맞붙인 부분에는 복륜을 돌려 머리에 쓴 고깔 모양인데 측판의 일부는 부식, 파손되어 있다.

특히, 금동관모의 뒤편의 휘어진 긴 나팔 모양의 장식은 일본 규슈의 에타후나야마 고분의 출토유물과 동일한 것으로 당시 백제의 뛰어난 금속공예의 기술이 일본에 전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동신은 2장의 금동측판(金銅側板)을 잔못으로 앞.뒤부분을 고정시키고 밑창판을 대어 만들었는데 밑창에는 9개의 스파이크가 박혀있다. 입점리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인 금동관모, 금동신발은 정교하면서 부드러운 이음새와 금동 위에 새겨 넣은 무늬들은 백제의 장인 정신을 보여준다. 후나야마 고분이 6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므로 입점리 고분이 후나야마 고분보다 앞선 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에 1호분 출토 금동관의 경우, 금동모관 외에 금동대관(帶冠·띠 모양의 금동관)으로 추정되는 편 등 관련 출토품과 금동삼각형장식 한가운데 새겨져 있는 봉황 등 출토 금동관 부속품을 통해서도 당시 백제가 새와 나무를 신성시했다는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입점리고분 축조방식을 살펴보면 당시 백제의 무덤 축조기술이 일본에 전파됐을 가능성도 상상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백제에서는 판석으로 만든 돌널(석관)이 6세기 이후에야 유행했는데 입점리고분보다 후대인 일본 후나야마고분에서 그러한 석관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입점리 일대에서 발견된 수혈식 석곽분은 백제초기의 무덤과 구조형식이 대체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판명됐다.
이는 백제중기 시절 수도를 공주로 옮기는 과정서 일부 지배집단이 공주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익산지역으로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삼룡 전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은 고분군 발굴 당시 “입점리는 위치상으로 볼 때 당시 부여와 공주로 이르는 물길 입구이며 남쪽으로는 익산과 김제를 통치할 수 있는 정치적 요충지였다”며 “무덤의 구조가 공주 송산리 5호분과 같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예상됨에따라 5세기때 왕족 중 한사람이 이 일대를 맡아 통치했을 것이 유력하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1500여년간 말 없이 역사속에 파묻혀 있을 뻔했던 입점리 고분군의 실체. 이 고분군과 그속에 안장된 고분 주인들은 최근 재조명되는 백제역사에 당당히 한 획을 그으며 ‘다시 쓰는 백제사' 복원에 새롭게 한 페이지를 장식할 것으로 보인다.

 

별도첨삭
사질토(모래입자와 점토의 함유율이 높고 작물에 필요한 영양분은 적으나 통기성이 좋고 유기물의 분해가 빠른 흙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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