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영두(전북동화중학교장, 전북교총회장)
  “세상을 살아가는데 한 걸음 양보하는 것을 높이 여기니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바탕이 된다. 사람을 대할 때는 너그럽게 대하는 것이 복이 되니 이는 남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이롭게 하는 바탕이 된다.” 이는 ‘채근담’에 나오는 말입니다.
  작곡가이자 유럽 일대를 무대로 활동한 교향시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1811∼1886)가 여행 중 어느 작은 도시를 들렀습니다. 리스트 제자를 자칭한 한 여류 피아니스트가 극장에서 연주회를 한다고 하여 갔습니다. 제자라는 소리에 반가워 팸플릿을 보니 처음 듣는 이름이자 생소한 인물이었습니다. 리스트가 이상히 여기어 그 연주자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이름을 빌리지 않으면 저 같은 무명 음악가의 연주회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아 그랬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녀는 울먹이며 죄를 빌었습니다. 그러자 리스트는 피아노가 있는 음악실로 그녀를 데리고 가 피아노 연주를 시켰습니다. 전력을 다하는 그녀를 보고 몇 가지 수정을 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방금 나에게 피아노를 배웠소.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오늘 연주회를 당당하게 해 주시오”라 했습니다. 얼마나 통큰 너그러운 마음입니까? ‘용서’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이 예화를 통해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용서’라는 의미는 상대방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하겠습니다.
  남을 비난하기를 좋아하면 그 사람도 남의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나 지신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이해하고 잘못을 용서해 줄 수 있는 아량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느끼는데도 나를 싫어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심보는 남이 잘 되면 그를 칭찬하는 쪽보다 흉을 보는 쪽으로 치우쳐져 있습니다. 심성 수련이 안 된 탓이지요. “백 명의 친구가 있는 것보다 한 명의 적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백 명의 친구가 나를 위해준다 해도 마지막 한 명의 적이 나를 무너뜨리기엔 충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을 뒤돌아보라는 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강하고 세다고 해서 보잘것없다 생각되는 사람들을 무시했다간 어느 세월에 내 앞에 강한 사람이 서있게 된다는 것, 그것은 정말 거짓 없는 현실입니다.
  살다 보면 우연치 않게 꼬인 일로 남과 갈등의 매듭이 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반드시 그 갈등의 매듭을 풀고 가야 합니다. 만약 꼬인 매듭을 안 풀면 오래도록 더 꼬이고 꼬여 훗날 아주 풀기 힘든 매듭으로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해와 배려가 특효약입니다. 즉, 양보하고 져주면서 베푸는 것이 결국 이기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는 전략으로 머리를 숙여보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결국 사필귀정事必歸正 의 결과가 온다는 사실을 살아가면서 많이 체험해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필연적 사실을 알면서도 대부분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 눈이 어두워 이기심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가끔 친구들과 사소한 일로 다투어 서먹서먹한 관계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데 서로의 자존심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 상대를 용서하지 않고 비난을 하곤 합니다. 그러다 보면 지금껏 쌓아온 공든 탑이 순간적으로 무너져 내립니다. 이렇듯 일상에서 호박잎 한 장의 욕심과 한 발 먼저의 승부로 인해 원한과 증오로 얽혀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용서와 화해 그리고 베풂은 모두 관용寬容하는 마음입니다. 이 관용의 마음이 일상에서나 사회생활에서 쌓이고 많아질 때 상생相生의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나무라며 손가락질 할 때 나머지 세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키고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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