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정부론을 처음 주창한 이는 경제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아담 스미스였다. 그는 자유주의 고전경제학을 확립한 선구적 학자로 정부의 역할은 개인과 사회의 안녕과 질서 유지 정도에 그쳐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국방이나 치안 그리고 공공사업 등이 정부의 역할이며 그 이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이 주장을 실천에 옮긴 대표적 예가 바로 19세기 초기 자본주의 시대 야경국가다.
  작은 정부론은 그래서 초기 자본주의 시대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졌다. 대부분 선진국들은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거나 사회 구성원의 억압이나 불법을 막는 법질서 확립, 공공사업을 운영하는 외에는 다른 역할을 하지 않았다. 특히 시장 개입은 금기였다.
  하지만 1929년 미국 대공황은 이런 작은 정부론을 근본부터 흔들었다. 급격한 경기변동과 빈부 격차, 복지 등 여러 면에서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역할이 강요되다시피 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은 작은 정부론을 버리고 큰 정부론을 선택한 결과였다. 정부가 재정확대를 통해 시장에 개입함으로써 대공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이후부터는 큰 정부 전성시대가 왔다. 이 때 각광을 받은 경제학자는 수정자본주의를 내세운 케인즈였다.
  다시 1970년대 석유파동은 큰 정부론을 밀어냈다. 불경기 속에서도 물가가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닥치자 정부로서는 손 쓸 도리가 없었고 이를 계기로 다시 작은 정부론이 득세했다. 비대해진 정부가 민간을 과도하게 통제함으로써 경제의 활력을 떨어트린다는 지적이 줄을 이었다. 결국 각국 정부는 큰 정부론을 버리고 작은 정부론을 받아들였다.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나 영국 대처정권이 대표적 예다.
  새 정부의 인수위 역할을 하는 국정자문기획위의 김진표 위원장이 최근 작은 정부가 좋은 정부라는 잘못된 믿음은 버려야 한다고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작은 정부로 낙수효과를 가져오리라는 기존 경제패러다임은 실패했다”며 “그러다보니 청년들에게 헬 조선 이생망(이번 생애는 망했다)는 얘기가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새 정부는 투자유치 중심 경제에서 좋은 일자리 창출을 매개로 하는 소득주도 성장으로 경제정책을 전환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수십 년 간 작은 정부론은 가장 바람직한 정부 미래상으로 인식돼왔다. 우리나라에서도 김영삼 정부나 김대중 정부 당시 이를 추진한 적이 있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지금의 경제난을 푸는 데도 작은 정부론은 한계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무작정 큰 정부를 지향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이런 때는 상황논리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게 정답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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