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국가를 위해 희생하고 공헌한 분들에게 추모와 감사를 전하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의 명예와 자긍심을 고취하고 숭고한 희생정신을 온 국민의 귀감으로 삼아 국민 애국심을 승화시키는 데 의의가 있지만 그 취지가 퇴색되고 있다.

오래전 임무 수행이나 훈련 과정에서 신체가 절단되는 등 큰 부상을 당했지만 입증할 자료가 없다며 국가유공자로 인정되지 못하는가 하면 입증할 자료를 국가가 유족에게 요구하는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유공자 당사자와 유족들이 처한 현실을 살피고 대안을 모색해본다.<편집자 주>

 

“국가가 먼저 했어야 할 일을 왜 우리가 해야 합니까”

남원에 거주하는 김순희 씨(45)의 분노 섞인 말이다.

순희 씨는 지난 1989년 9월께 돌아가신 6.25참전용사였던 아버지 고(故)김동수 씨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약 10개월 동안 국가보훈처와 힘겨운 싸움을 했다.

고인 김씨는 지난 1951년 2월에 입대해 임실지역에서 참전 중 수류탄 파편이 온 몸에 박히는 다발성 부상은 물론 우측 얼굴에 큰 파편을 맞아 얼굴 반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었다.

고인은 전역을 한 뒤에도 고통 속에 힘든 나날을 보내다 생을 마감했다. 순희 씨는 그런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고 자랐다.

그러던 중 지난 2011년 6월께 지인의 말을 듣고 아버지의 명예 회복에 직접 나섰다.

지인은 순희 씨에게 “우리 아버지도 참전했고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아 혜택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순희 씨는 보훈지청에 문의를 했으나 “직접 관련서류 등 입증자료를 제출하라”는 무책임한 답변을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를 생각해 서류를 찾기 시작했고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아무런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병무청, 국가보훈처, 육군정보관리단 등 각 기관들에 민원을 넣어 직접 자료를 요청해야 했으며 서류를 준비하는 시일만 약 3개월이 소요됐다. 서류접수 뿐만 아니라 긴 심사과정도 순희 씨를 힘들게 했다.

심사과정에서도 추가 서류를 계속해서 요구했고 순희씨는 관련 서류를 찾기 위해 아버지가 근무했던 임실지역 실사까지 나가 입증자료를 확보했다. 심사 진행과정도 국가보훈처의 공문과 통보가 아닌 순희 씨의 확인전화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순희 씨의 이 같은 노력에 마침내 약 10개월 만인 지난 2012년 4월에 국가유공자로 인정돼 올 9월 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고인이 생을 마감한지 23년 만이다.

순희 씨는 “국가보훈처는 말 그대로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을 발굴해 혜택을 주는 일을 해야 하는 기관이다”며 “왜 일개 국민인 우리가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도맡아야 하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어 “국가유공자의 예우만 강화할 것이 아닌 발굴에 힘쓰길 바란다”고 말했다./하미수 기자·misu7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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