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욱 전주대 인문대학장

프랑스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지식인의 무덤’이라는 에세이에서 ‘창조’라는 단어에 인용부호를 사용하면서, 정보처리 기계의 확산과 전면적인 변화의 맥락에서 지식의 성격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식은 정보의 양으로 번역될 경우에만 새로운 채널에 들어맞게 되며, 조작 가능해지며, 기계로 변역될 수 없는 지식 구성물은 모두 폐기될 것이며, 새로운 연구방향도 그 최종 결과가 컴퓨터 언어로 번역될 수 있는 가능성에 지배될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리오타르의 진술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지식은 팔리기 위해 생산되고 새로운 생산에서 가치를 얻기 위해 소비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이 진술이 1979년에 이루어진 것을 염두에 두어보면 리오타르의 통찰력은 경이로운데 특히 지식의 소비를 새로운 생산에서 가치를 얻기 위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측한 부분은 검색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수집된 정보를 편집 과정을 거쳐 새로운 정보로 가공하고 그 가공된 정보를 다시 인터넷에 공개됨으로써 교환가치를 획득하는(아날로그 정보와 달리 교환가치가 화폐가치로 정량화되는 것이 아니라 조회수와 댓글로 표시되는) 디지털의 지식 속성을 적확하게 파악하였다. 다만 사용가치가 화폐가치로 교환되는 자본주의적 상황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고 주장에서 리오타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은 정보화 사회에서 지식과 정보의 사용가치는 공유와 편집을 통해 교환이 가능할 때 극대화된다는 점이다. 아날로그 시대는 사적인 지식 재산을 화폐와 교환하였지만, 디지털 시대에 지식 재산은 그것이 인터넷에 올려지는 순간 공유와 편집을 통해 다른 지식 재산과 교환되는 공공재가 된다.

지식 재산이 다른 지식 재산으로 교환될 때 작가는 편집자로 대체된다. ?저자란 무엇인가??에서 푸코가 생각하는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지적 생산물의 생산자가 아니라, 한 문화 안에서 중요한 담론을 생산하는 사람이다. 그는 호머,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의 교부들, 그리고 19-20세기의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등을 담론성의 창시자라고 말했는데, 왜냐하면 이들은 단순히 자신의 작품, 자신들이 쓴 책들만의 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상의 것, 즉 다른 텍스트들의 형성가능성과 규칙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그들은 자기 자신의 텍스트만의 저자에 불과한 다른 저자들과 구별된다. 예컨대 프로이트는 단순히 ??꿈의 해석??의 저자가 아니고, 마르크스는 단순히 ‘자본론’의 저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들 뒤로 무한한 담론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뛰어난 지식 재산은 공유되었고 각주로 주석으로 처리되어 인용되었지만, 공유되는 과정에서 원본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금기가 동시에 작동하였다. 금기는 텍스트에 대한 자유로운 순환, 자유로운 조작, 허구의 자유로운 창작과 해체 및 재구성을 방해한다. 그리고 이제 디지털 공간에서 지식과 지식인을 에워쌌던 모든 금기는 해체되어 버렸다.

인터넷으로 기호화된 새로운 지식 공간은 사유를 구성ㆍ재구성ㆍ통신ㆍ개별화ㆍ재개하는 공간으로, 구분이 사라지는 지식의 공간에서는 지식 집단들이 부단한 역동적 재구성을 통해 거주하고 활동한다. 지식의 공간에서는 대상이 주체를 구축한다. 대상이란 지식 집단 및 그 세계가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변화를 말한다. 그것은 마치 주체가 주체 자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계는 여기에서 단지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지식 집단의 세계, 곧 그 안에서 사유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의미하고, 그 안에서 사유하고, 따라서 그것으로 하여금 지식 집단이 되게 하는 세계이다. 단일 지성은 지식의 공간에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집단지성으로 확장되고, 각자의 지식과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스스로를 편집 과정의 한 지점으로 위치시킨다. 주체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편집의 과정을 통해) 지식의 공간을 매끈매끈하게 하고, 넓히고, 조직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의 세계를 펼쳐나가는” 지식 집단이 대체함으로써 편집은 쓰기의 가장 유력한 방식이 될 것이며, 편집적 사고는 창의적 사고를 대신하게 되고, 편집자는 작가가 누렸던 사유와 권력의 즐거움 대신에 공유와 편집을 통해 확장되어가는 담론의 생산성에서 즐거움을 찾게 될 것이다. 이제 지식 혹은 지식인의 운명은 가혹하면서 동시에 매혹적인 새로운 길로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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