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의 건축술로 빚은 '호국사찰'

<전북백제 후백제 재발견-11. 익산 미륵사지(상)> 마한 중심지 금마에 지어 불교의 힘으로 신라 견제 백제시대 최대 규모 가람 국내 유일 '삼탑삼금당' 1980년부터 본격 발굴조사 전라일보l승인2017.07.27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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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미륵사는 외세 침략을 막기위한 호국사찰이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백제의 고도 하면 충남 공주와 부여를 떠올리는게 당연시 여겨졌었다. 그 곳에는 백제의 도시라 불릴 만큼 다양한 역사와 문화재가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익산 역시 백제의 도시로 알려져 있지만, 공주나 부여처럼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익산은 백제 제30대 왕인 무왕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장이다. 백제 무왕이 누구던가. 신라의 선화공주와 국적을 초월한 전설 같은 순애보를 남긴 왕이다.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으로 대표되는 백제의 또 다른 고장, 익산에 묻혀 있는 백제 이야기를 만나보자.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돼있는 백제 최대의 절인 미륵사지는 동서로 172미터, 남북으로 148미터에 이르고 넓이가 2만 5천 평에 달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이다.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공예 등 각종 문화 수준이 최고도로 발휘됐을 것으로 짐작할 뿐만 아니라, 신라 진평왕이 인력을 지원해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된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륵사 창건에 대해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한 후 왕이 된 마동 즉, 무왕(백제 30대왕 600-641)이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이었다. 그 때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 이를 계기로 미륵사를 창건하게 됐다. 삼존을 위해 전(금당), 탑, 낭무(화랑)을 세웠다”고 한다.
이와 달리 미륵사의 창건에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신앙만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즉 백제가 국력을 확장하기 위해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거라는 추측과 동시에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고자 지은 호국사찰로서 백제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미륵사가 백제불교에서 미륵신앙의 구심점이었다는 점은 신라 최대의 사찰인 황룡사가 화엄사상의 구심점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황룡사가 1탑 3금당식인 것과 달리 미륵사는 3탑 3금당식 배치이다.<그림 참고> 황룡사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화엄사상, 미륵사는 미륵사상을 가람에 구현하고 있다. 미륵사는 일반평민 대중까지 ‘용화세상’(미래에 미륵불이 세상에 출현해 중생을 해탈시키는 시대를 뜻함)으로 인도하겠다는 미륵신앙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원대한 꿈을 품고 건립된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창건한 이후 조선시대까지 사세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백제의 전 국력을 집중하여 창건하였기 때문에 백제 멸망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미륵사는 어느 때 폐찰이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조선 정조 때 무장 지역의 선비였던 강후진이 지은 ‘와유록‘에 “미륵사에 오니 농부들이 탑 위에 올라가 낮잠을 자고 있었으며 탑이 백여 년 전에 부서졌더라” 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대다수의 절들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불타버린 것과 달리 다른 원인으로 폐사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 참고)
이후 미륵사지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남아 있다가 일제강점기 때인 1915년 보수와 함께 실측이 이뤄지기 시작한다.
 1910년대 일본 학자가 조사한 ‘가람(절)배치‘에 의하면, 미륵사지는 탑과 금당(金堂)이 마련된 일탑식(一塔式) 건물이 ‘品’자 모양으로 3개가 합쳐져 만들어진 사찰로 추정되어 왔다. 그 뒤 1974년과 1975년 두 차례에 걸쳐 원광대학교가 동탑지를 조사하기도 하였으나, 전체적인 성격을 파악하기에는 미흡했었다.
이에 정부에서 중서부고도문화권개발사업의 하나로 미륵사지의 발굴조사를 통하여 사찰의 정확한 규모와 아울러 가람배치의 성격과 구조를 밝혀내고, 발굴 결과 얻어진 자료를 통하여 유적을 정비·보존할 목적으로 1980년부터 1995년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발굴조사를 통해 이전까지 알려졌던 ‘品’자모양의 사찰 배치설은 맞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는 것과 동시에 사지의 전체적인 규모도 밝혀지고 2만여 점의 유물도 수습됐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륵사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삼탑삼금당’이 배치된 사찰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울러 백제무왕이 세운 곳으로서 발굴된 사리기를 통해 창건연대가 정확히 밝혀져, 백제사와 불교미술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가람이란?
불상, 탑 등을 모셔놓고 승려와 신자들이 거처하면서 불도를 닦고 교리를 설파하는 건축물 혹은 그 소재 영역을 뜻한다. 절 ·사원·정사·승원 ·가람 등으로 불린다.

금당이란?
대개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을 말하는데, 가람배치의 중심으로 모든 건물들이 이 금당을 기준으로 배치된다. 《삼국유사》에 금당에 관한 여러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금당이 삼국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당이라는 명칭은 전당 안을 금색으로 칠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과, 금색의 본존불을 내부에 안치한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별도 박스
익산 미륵사지유물전시관
익산 미륵사지를 보려면 먼저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1997년에 개관한 이 전시관에서는 창건에서 폐찰까지 미륵사지의 역사뿐 아니라 1만 9,000여 점에 이르는 출토 유물 가운데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금제 사리장엄구와 금제 사리봉안기는 실물 크기로 복제해 전시하고 있으며, 2000년에 출토된 금동향로(보물 제1753호)도 만날 수 있다. 미륵사지를 한 바퀴 둘러볼 수 있도록 관람로를 조성해 3탑 3금당의 가람 배치, 2기의 당간지주, 연꽃무늬를 새긴 석등받침과 지붕돌인 옥개석 등 미륵사의 옛 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흔적을 곳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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