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에 벌어진 기벌포전투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와의 전투였다. 676년 기벌포전투는 신라와 당나라가 한반도 주도권을 놓고 벌인 전투였다. 이 두 전투가 벌어진 기벌포(백강)는 현재 금강으로 비정되고 있다.
  반면 663년에 벌어진 백강 전투는 금강이 아닌 현재 동진강에서 벌어진 전투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박영철 군산대교수는 지난 2016년 11월 열린 백강전투 재조명을 위한 한·중·일 국제학술세미나에서 자료의 재검토를 통해 663년 백강 전투 당시 백강의 위치를 동진강으로 비정한 바 있다.
  박 교수는 주류성의 위치와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나오는 ‘이에 손인사와 유인원 및 신라왕 김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갔다. 유인궤 및 부여융은 수군과 군량선을 이끌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만나 함께 주류성으로 가기로 했다’는 기록을 토대로 전략의 타당성과 시간의 문제에 주목하며 백강이 현재의 동진강임을 강조했다.
  660년 7월 백제는 나당연합군에게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 당한다. 백제 왕조가 무너졌지만 이후 백제지역에서는 부흥운동이 활발히 일어난다. 백제의 부흥운동은 한 때 당이 설치한 웅진도독부를 포위할 정도로 활발히 진행되면서 신라와 당나라를 긴장시켰다. 이에 당나라 고종은 군사 7000명을 징발하여 손인사(孫仁師)로 하여금 통솔하여 바다를 건너 유인원을 지원하게 했다. 한편 백제부흥군 내부에서는 내분이 있었다. 손인사가 출병하기 전 복신이 이미 도침을 죽이는 내분이 있었는데 다시 부여풍이 복신을 죽이는 사변이 일어났다. 이후 부여풍은 내부 분열을 막는 한편 당나라에 맞서기 위해 고구려와 왜국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했다. 당시 고구려는 군사를 보내지 않은 반면 왜는 군사를 보냈다. 결국 신라와 당나라, 그리고 백제와 왜국 등 당시 4개 나라가 참전하는 대규모 국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중국 섬서사범대학 역사문화학원의 바이건 싱 교수는 ‘나당연합군과 백강구전투’ 발제를 통해 밝힌 당시 전투 상황과 이후 파급 영향을 밝혔다. 중국 측 시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더라도 매우 흥미 있는 내용이다.
  바이건 싱 교수에 따르면 당시 백강 전투에 참전한 나당연합군의 규모는 25000명 수준이었다. 전선은 약 170척 규모. 반면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달려온 왜군은 400여척의 전선에 3만2000명 규모였다. 전함의 수준도 발전단계에 있던 왜보다 당나라가 월등했다. 또한 당나라군 지휘관들은 전략적으로 뛰어난 인물들이었다. 당나라군은 왜군보다 앞서 백강에 전선을 배치했고 당나라군에 대한 정확한 정보 없이 상대를 얕잡아 봤던 왜군들은 400여척의 전선 대부분을 잃는 참패를 당한다. ‘연기와 불꽃이 온 하늘에 퍼졌고 바닷물은 적색으로 변했다’고 묘사할 만큼 당시 전투는 왜군의 완패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나당연합군은 주류성을 함락시키고 백제부흥군을 소멸시켰다.
  그는 이 전투 영향에 대해 ‘이 전투에서 패배한 왜가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포기하고 내부개혁과 중국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고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하여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와 동시에 왜는 항상 경계심을 높이고 백제·고구려 이민자들을 받아 들여 한반도 양식의 견고한 성벽을 쌓는 적극적인 방어 정책을 펼쳤다’고 주장했다.
  이밖에 백강 전투의 의미와 영향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다. ‘중국과 일본이 최초로 벌인 전투’ ‘전투 패배 이후 이어진 주류성의 함락으로 백제 부흥운동의 사실상 종식’ ‘10만 명으로 추정되는 백제유민의 일본 유입과 이로 인한 일본 문화의 발전’등은 이미 학계의 공인된 견해다. 이와 관련 박노자 교수는 ‘4만2000명이 참전하고 1만 명이 전사하며 패배한 이 전투는 고대사를 통해 왜국이 외부에서 당한 가장 큰 패배’라고 밝힌 바 있다. 또 왜국은 이 패배를 매우 침통한 사건으로 받아 들였다. <일본서기>에 보면 당시 왜국은 백강전투 패배와 주류성 함락 이후 ‘주유가 항복하였구나. 이 일을 어찌할까.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어졌도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어찌 또 갈 수 있을까’라고 한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기록은 왜의 뿌리가 백제임을 간접적으로 말하는 듯하다.
  또한 백제의 마지막 숨통을 끊고 왜국 또한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만든 이 전투는 4개국이 아닌 당나라와 신라가 한반도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는 구도를 낳는다. 이러한 구도는 676년 기벌포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의 삼국통일로 이어진다.
  이와 함께 663년 백강전투에 한정 짓지 않고 660년과 676년 기벌포 전투까지 일별하며 한반도가 해양성국가임을 증명한다는 주장이 눈길을 끌고 있다.
  박영철 군산대교수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은 중국과 한반도간의 최초의 전면전으로서 대륙성 국가와 해양성국가간의 전쟁으로 신라는 한반도 최초의 통일된 해양성 국가의 실현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반도의 역사에서 해양력이 돌출한 시기는 삼국의 통일에서 고려왕조에 걸친 시기였다. 이 시기의 금강하구지역은 삼국통일을 완수한 국제적 규모의 기벌포전투에서 보듯이 유라시아 동해안의 지정학적 요충지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에 와서 대륙편향적인 역사가 지속됨으로 인해 소홀시 된 금강하구의 역사는 해양사의 연구가 강조되는 오늘날 시점에서 재조명돼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금강과 동진강에서 벌어진 모두 3차례의 국제적인 전투가 전북의 서해안, 즉 현재 새만금지역에서 벌어졌던 점에도 주목해 보자. 지난 4월 전라북도 지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받은 고려유적이 바로 선유도에 있던 숭산행궁지(고려 임금 임시거처)라는 점을 고려하면 전북의 바닷길은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중요한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이병재기자·kanadasa@

▲군산 선유도 고려유적
‘선유도 고려유적’은 선유도해수욕장 인근 망주봉 아래에 위치해 있으며, 고려시대 임금들의 임시거처인 숭산행궁지로 고려시대 해양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선유도는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해양문물교류의 허브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1123년 송나라 국신사(國信使)에 대한 국가 차원의 영접행사가 이루어진 곳이다.
  사신을 맞이하던 군산정, 바다 신에게 해양제사를 드리던 오룡묘, 사찰인 자복사, 객관 등이 있어 고려 해양역사문화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역사적 현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유도의 고려유적지는 문헌기록과 고고학적 실체가 접목된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으며 전라북도 지정문화재 제135호로 지난 4월 7일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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