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부활'··· 패망의 울분 씻고 꿈과 희망을 심다

<전북백제 후백제 재발견> 신라 정부 타락·부패 흉년에 도적떼 넘쳐 민심 흉흉··· 견훤, 암울한 정세 흐름 간파 892년 무진주 점령 왕위 올라 전라일보l승인2017.09.07l16면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최근 후삼국 시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고려 건국과정이나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 등 기존의 고려 중심의 시선에서 벗어나 후삼국 자체를 조명해야한다는 시각이 호응을 얻고 있다. 더불어 후삼국 건국 주역인 견훤이나 궁예에 대해서도 선입견을 벗어나 새롭게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후백제 수도였던 전주 나아가 전북에서도 후백제 역사와 정체성을 찾기 위한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다. 도성을 비롯해 유적과 유물, 대외관계 등 전반적인 조사와 연구가 이뤄지고 있는 가운데 본지에서는 견훤의 전주성 입성과 후백제 도성을 2부에 걸쳐 살펴본다.
 
(상) 견훤의 전주성 입성
▲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아차 마을 갈전2리에서 가난한 농부 아자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출생부터 남다른데 <삼국유사> 지렁이 설화에서는 지렁이와 한 여인 사이에서 났다고 밝히고 있으며 여러 전설에 따르면 어린 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마다 동물들이 보호해줬다고 한다. 
  체격이 건장하고 힘이 장사였던 그는 훗날 가업인 농부가 아닌 군인의 길을 택했으며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만 일대에서 복무했다. 교통의 요충지에서 해적을 소탕하기 위해 머물렀던 만큼 견훤은 자연스레 그곳에서 초기 인맥을 형성했을 거다. 
  해적과 싸우며 풍부한 실전경험과 전문적 군사력을 갖게 됐는데 이는 일개 사졸에서 사령관직으로 출세하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중국제 물품이 출토된 마로산성을 비롯해 그 일대를 손에 넣는 등 서남해안 해상세력을 통제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거뒀다.
  순천 지역 호족과 혼인관계를 맺었으며 해적집단과도 규합했다. 중국이라는 큰 세계에 눈뜨고 지식인층을 확보한 건 항구에 드나드는 유학생과 유학승, 상인들과 자연스레 접촉하면서다. 

▲ 후백제의 시작
견훤은 언제부터 왕이 되려 했을까. 약탈과 파괴를 넘어 큰 뜻을 품고 있었고 위에서 언급한 여러 능력을 갖췄다고 하나, 조정의 부패와 사치로 국가 기능을 상실해가던 신라 정세가 결정적 계기가 됐을 거다.
  당시 신라에서는 임금의 총애를 받는 간신들이 정권을 농락하고 법령을 문란케 하는 등 국가기강이 무너지고 있었으며 흉년, 기근, 질병과 도적떼들이 넘쳐났다. 견훤은 타락하고 부패한 신라 정부에 강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으며, 이는 경주에 들어가 포석정에서 궁녀들과 술 마시며 놀고 있는 경애왕을 처형하고 김부를 경순왕으로 옹립하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더불어 당과 신라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켰단 사실에 분노했으며 백제의 계승국가를 마련해 의자왕이 겪은 패망의 울분을 씻어주고자 했다. ‘백제 재건’과 ‘의자왕의 숙분 풀기’를 명분 삼아 병력을 이끌고 지금의 순천과 여수 일대 주변 고을들을 하나하나 점령해갔다.
  암울한 상황에서 백성들에게 백제의 부활이라는 꿈과 희망을 심어줬던 것도 민심의 흐름을 누구보다 잘 파악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892년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무진주에서 세력 규모가 커지자 900년 완산주(지금의 전주)를 도읍으로 정하고 ‘백제’라 선포했다. 후백제는 후대 역사가들이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 후백제 도읍, 왜 전주일까
전주로 천도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제기됐다. 나주 세력과 멀어져 광주 배후 지역이 취약해져서, 군사조직이 필요한데 통일신라시대 전주에 군사력이 집중돼서 등이 있으나 반박도 적지 않다.
   전자는 나주 세력이 왕건과 결탁한 시점이 903년이기 때문에 900년 전주로 천도해 사건전개상 앞뒤가 뒤바뀌었다는 의견이 있고 후자는 7세기 후반 설치된 23군호 단계에서 전주가 타 지역에 비해 군사력이 집중돼 있긴 하나 경덕왕대 이후에는 무진주와 완산주의 군사력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지적이 있다.
   왜 전주를 택했는지 정확히 알 순 없으나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거란 분석이 많다. 일단은 견훤이 전주를 매우 중시했다는 점이다. 백제가 한산 즉 오늘의 서울에서 개국했음에도 전주에 인접한 익산 금마산에서 개국했다고 인식한 데서 엿볼 수 있다.
  무진주를 점령했을 때부터 백제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 금마산이 보이는 전주를 중요시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실제적인 이유들도 있다. 삼한의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기에는 무진주는 지나치게 남서쪽에 치우쳐 있을 뿐 아니라 그 호족들은 백제 귀속의식이 희박했다. 한반도 전체를 통괄하고 백제권 중심지로 꼽히는 전주로의 진출이 불가피했을 거다.
  나주 호족들의 반발도 고려돼야 할 거다. 나주 호족이 항의해 견훤이 전주로 천도했다기에는 시간상 순서가 맞지 않으나 반대로 견훤이 전주로 천도했기 때문에 나주 호족이 반발하는 건 생각해 볼 수 있다.
  견훤과 나주 호족이 일찍부터 대립한 것도 생각해야 하는데 견훤만큼이나 견고한 해상세력으로 무진주 옆에서 위협하는 나주 호족이 달갑지만은 않았을 거다.  
 
 


전라일보  webmaster@jeollailbo.com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전라일보의 다른기사 보기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전라일보소개기사제보광고안내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560-040]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전라감영로 75  |  대표전화 : 063)232-3132  |  팩스 : 063)284-0705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유 동 성
Copyright © 2017 전라일보.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