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 의료원의 한 의사는 자신이 화병에 걸렸다고 믿는 한국 교포 3명을 치료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미국 정신의학회지에 발표했다. 이때부터 한국의 화병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1996년 미국 정신의학협회는 화병을 ‘한국 민속 증후군의 하나인 분노 증후군으로 분노의 억제로 인해 발생하는 병’이라고 정의하고 그 병명을 한국어 그대로 ‘Hwa- Byung’이라고 표기했다. 이렇게 미국에서 화병에 대한 논의가 일자 한국에서도 관련 연구가 활발해졌다.
  화병은 서양에서는 물론 같은 아시아 문화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한국 특유의 정신의학적 증후군이다. 쉽게 말하면 억울한 감정이 쌓인 후에 불과 같은 양태로 폭발하는 질환이다. 속에 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느낌과 함께 큰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는 듯한 느낌 그리고 커다란 덩어리가 목 안에 들어가 있는 느낌 등이 있다. 구체적 증상을 보면 우선 신체적으로는 불면증과 위장장애, 식욕부진, 불쾌감, 두통 등이 나타난다. 또 정신적으로는 분노와 우울, 비관, 허무감 등 증상이 따른다.
  이 질환은 억울한 일을 참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많이 발생한다. 우리나라 문화는 참는 게 미덕이다. 그래서 웬만한 일은 그저 묵묵히 견디는 게 상책이라는 풍조다. 고된 시집살이나 큰돈을 떼이게 되었을 때,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직장 상사로부터 모욕과 억압을 받을 때 등 경우에 꾹꾹 눌러 참는 바람에 화병이 난다. 지금까지는 주로 중년 여성에게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연령대도 낮아지고 남성 여성 가리지 않는 게 추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의하면 화병 환자 수는 명절이 있는 달에 연중 최고치를 기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관이 빅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한방병원을 찾은 화병 환자는 모두 1만 3263명으로 여성 환자가 80%를 차지했다. 또 지난해 추석이 들어 있던 9월에 2016명의 환자가 나와 연중 가장 많았다. 이처럼 명절 이후 환자수가 증가하는 것은 스트레스로 인한 명절 증후군이 주원인인 것으로 분석된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한국에 화병이 흔한 데 대해 전통적 정서인 ‘한(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이 분노가 되고 이것이 쌓여 발병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근본적 대책이 나오기 힘들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화병을 막기 위한 노력이 큰 효과를 거두기 힘들다. 다만 무조건 억울하거나 부당한 처사에 대해 참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특히 명절에 겪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현명하게 풀어내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좀 더 진지한 논의가 따라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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