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서늘해진 바람이 불어오는 날, 내면의 감정을 따라가던 손가락이 이 시집 앞에서 딱 멈춘다.
  권오표 시집 <너무 멀지 않게>(모악)다.
  ‘모악시인선’이 여덟 번째로 펴낸 <너무 멀지 않게>는 어떤 간절함의 힘이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시집이다.
  그래서일까? ‘저무는 산모퉁이/남루한 풍경들이 애틋하’(‘시인의 말’)게 다가오면서 문득 먼 허공을 바라보게 된다.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마음은 그곳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다. 오래 전 우연히 만났던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하고, 서랍 어딘가에 넣어두고 영영 잃어버린 작은 물건 같기도 하다. 한 권의 시집을 읽는 일이 이런 게 아닐까? 이곳이 아닌 저곳을 눈여겨보게 하는 것. 앞이 아니라 뒤를 돌아다보게 만드는 것.
  시집의 특징은 드러냄을 최소화하는 미니멀리즘이다. 사유나 이미지를 더해가는 게 주류를 이루는 세태 속에서 덜어냄의 언어와 정서는 새로운 시적 미학을 창조한다. 하고 싶은 말을 내뱉지 않고 머금을 때, 시는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권오표 시인은 알고 있다. 시인은 내면에 많은 말을 품고 산다. 시인의 눈에 비친 사물들은 언어의 바벨탑처럼 끓어오른다. 그 부글거리는 언어들 중에 하나의 시어를 골라낼 때, 그 시어에서 우주가 탄생한다.
  시집은 아무 페이지부터 읽어도 좋은 거의 유일한 책이다. <너무 멀지 않게>도 마음 가는 시부터 찾아 읽는 재미가 있다.
  시집 <너무 멀지 않게>에는 권오표 시인이 이제 그만 잊고자 하는 것들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는 장면들이 가득하다. 얼핏 쓸쓸한 풍경 같지만, 권오표 시인은 우리 삶의 뒤편에 다채롭고 풍부한 사연들이 있다는 걸 새삼 깨우쳐준다. 그리하여 뒤돌아보지 않아도 따뜻해지고 든든해지도록 만들어준다. 그것이 <너무 멀지 않게>를 관통하고 있는 시적 울림인 것이다.
  문신 시인(문학평론가)은 “권오표 시인은 누구보다 정갈한 시를 쓴다. 깨끗하고 말쑥한 의미로 사용되는 정갈함은 그의 시에서 투명한 감각 지각을 확보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소멸 직전에서야 가장 명쾌하게 빛나는 삶의 국면들을 포섭해낼 줄 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투명한 세계에서 권오표 시인은 미묘하게 반짝이는 삶의 무늬를 솜씨 좋게 벗겨내는 것으로 시작(詩作)을 삼는다”고 말했다.
  권오표 시인은 1950년 순창에서 태어나 원광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전주 완산고등학교에서 30여 년간 아이들을 가르쳤다. 1992년 <시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여수일지>(문학동네)가 있다.
/이뱡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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