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세기 신라 하대는 극심한 혼란의 소용돌이였다. 국정이 문란해지고 각지에서는 반란이 빈발했으며 민심은 이미 신라 왕실을 떠난 지 오래였다. 이 와중에 출중한 인물이 두각을 나타냈다. 바로 대학자이자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었다. 그는 신라 골품제의 제약 속에서도 사회 개혁을 위해 헌신했으며 유교와 불교, 도교를 통합한 새로운 사회를 주창하는 등 맹활약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드러내 12세 때 이미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 최견일은 먼 길을 떠나는 아들에게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공부에 힘을 다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당나라에 건너가서도 재능을 발휘 18세에 빈공과에 합격해 여러 벼슬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특히 당나라를 뒤흔든 황소의 난 때 그의 문재는 빛났다. 그는 ‘토황소격문’을 지어 반란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고 조정의 주목을 받았다.
  29세 때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어지러운 국내 정세를 보고 시무책10조를 왕에게 진언하는가 하면 학문과 문학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가 주장한 유불선 삼교의 통합을 통한 한국적 고유사상 정립은 대단한 공헌이었다. 다음은 그의 글이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고 한다. 그 가르침을 베푼 근원은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는데, 실로 삼교를 포함해 중생을 교화한다. 들어와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이다.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노자의 뜻이다.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부처의 가르침이다.”
  그는 말년에 신라 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초야에 묻혀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남긴 시문과 사상 그리고 정치가로서의 행적은 역사에 길이 남았다.
  최근 최치원 인문관광도시 연합회는 기념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국비 2600억 원을 지원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 했다. 창원시와 군산시 등 모두 9개 지자체가 참여한 연합회는 최치원 관광활성화 용역 결과를 토대로 시군별로 차별화 되고 유기적인 사업을 제안했다. 연합회 측은 중국과 한국에서 존경받는 대학자 최치원의 유적을 문화관광자원화 하는 것을 시대적 사명이라며 국비를 확보해야 유적지를 벨트화하자는 구상을 제시 했다.
  한국 고대사에서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최치원은 이 시대 사람들도 꼭 알아야 할 문화자원이라고 할 것이다. 비록 현실 정치에 막혀 꿈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그가 남긴 시문과 사상, 정치 개혁안 등으로도 문화사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당연히 유적 벨트화와 관광 자원화에 정부의 대폭적인 지원이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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