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교룡산성 군기고터 발굴조사에서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는 등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7일 남원시에 따르면 교룡산성 정비복원을 위한 학술자료 확보를 목적으로 (재)전라문화유산연구원에 의뢰해 교룡산성에 대한 발굴조사를 시행하고 있다.

교룡산성 군기고터는 비교적 상세하게 위치가 구전돼온 건물지로, 지표에서 철제 화살이 수습되면서 조선시대 군기고터로 추정됐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 조선시대와는 관련 없는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의 대규모 건물지로 확인됐다.

건물지는 크게 3차례에 걸쳐서 중창됐으며, 이중 1차 건물지가 가장 잘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대지를 조성한 뒤, 다시 기반토를 조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축조했다. 건물지의 규모는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규모는 장축 1420cm, 단축 850cm, 주간 거리는 200cm 내외이며, 정면의 축대를 기준으로 동‧서쪽 기단이 명확하게 확인된다. 축대는 돌과 흙을 이용해 상당한 넓이와 두께로 조성됐다.

2차 건물지는 기단 장축방향의 북쪽 초석 7개만 남아 있는 상태로, 1차 건물지 동‧서 기단을 그대로 사용했다. 북쪽 기단이 남쪽으로 전진하면서 새롭게 조성된 건물지로, 1차 건물지 폐기 후 기와를 두껍게 깔아 기단토를 조성한 위에 조성됐다. 이때 사용한 기와는 1차 건물지에 사용된 기와로 추정되며, 잘게 부숴 사용했다. 하지만 1차 건물지의 사용시기와 2차 건물지의 사용시기는 거의 동일한 시기로 판단된다.

3차 건물지는 추정 초석만 일부 확인될 뿐 본래 구조나 규모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다.

유물은 평기와류가 대부분으로, 무늬가 없는 무문과 선 모양의 무늬가 새겨진 선문계 기와, 격자문이 새겨진 격자문계 무늬가 다수를 이룬다. 특히 생선뼈무늬가 표현된 어골문계 기와가 소량 출토됐는데, 이는 어골문의 초기형태로 추정된다.

특히 지표에서 수습된 다량의 석환은 이번에 확인된 건물지와는 관계없으며, 동학혁명 때 남원에 주둔한 지휘부가 머물면서 발생한 유물로 추정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이곳이 군기고터로 전해지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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