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런히 놓인 까만 기왓장 지붕이 편안하게 들어온다. 낮은 담장 너머 한줄기 햇빛이 대청마루에 앉는다. 지나치는 집마다 다른 듯 같은 듯 포근함이 마당에 가득하다.
전주한옥마을은 오랜 세월 한옥마을을 지탱한 전통문화의 명소다.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전주한옥마을 길에는 전주 사람도 미처 몰랐던 유구한 이야기가 간직됐다. ‘한지길’, ‘숨길’, ‘선비길’, ‘사랑길’, ‘바람길’, ‘꿈길’, ‘돌담길’, ‘사드락 사드락 슬로투어 코스’ 등 한옥마을 둘레길은 그 길도 다양하다. 한국관광공사 역시 지난해 9월 주말에 가볼만한 곳으로 꼽은 바 있다. 전주한옥마을을 둘러싼 길을 따라 그 이야기를 쫓았다.

싸늘한 겨울바람 온데 없이 봄으로 넘어가던 지난 16일, 이날도 설 연휴를 맞아 찾은 관광객들로 한옥마을은 붐볐다. 옷깃을 거머쥐는 추운 날씨는 사라지고 영상 6도 거닐기 적절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은 한옥마을 공영주차장 인근 관광안내소에서 시작했다. 직원 안내는 물론, 관광지도와 같은 전주한옥마을을 처음 찾는 관광객들을 위한 자료를 구할 수 있다.
한옥마을 다양한 길 가운데서도 ‘견훤왕의 후백제 부흥을 향한 염원,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의 기상, 유창한 판소리 가락과 고고한 묵향의 기품까지 우리는 지금 천년역사의 숨결이 흐르는 전주, 전주한옥마을 오목대를 시작으로 저 멀리 억새가 흐드러진 전주천까지…숨길에서 숨 돌리고 숨 소리 들으며 숨 결 찾아 숨쉬기 바랍니다’고 설명된 ‘숨길’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거리 7054m, 소요시간 140분 ‘숨길’을 택했다.
한옥마을 공예품전시장과 전주 명품관 사이에서 첫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숲길로 들어서기 전 마주한 길은 ‘쌍샘길’이다. 한옥마을에서도 외진 곳에 위치한 곳으로, 예전 마을의 공동우물이었던 ‘쌍시암’이 있던 곳이라 하여 쌍샘길로 불린다. 5~6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두 개의 우물 가운데 하나는 남았지만 그마저도 도로가 생기며 없어졌다. 1950년대 가람 이병기 선생이 기거하기도 했던 유서 깊은 곳이다.
숲길로 들어서면 보호수로 지정된 당산나무 느티나무를 바로 볼 수 있다. 전염병 걸린 부모를 찾아 떠난 오빠와 죽은 줄도 모르고 오매불망 오빠를 기다리던 동생, 그 동생이 배고픔과 추위에 얼어 죽은 장소에 자라났다는 유래를 담고 있다. 넋을 기리고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해 정월대보름이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오목대는 작은 둔덕 정상에 있다. 천천히 올라도 10분이면 족하다. 야트막한 고개와 달리 내려 본 한옥의 고즈넉한 정취는 충분했다. 고려 말 이성계가 운봉 환상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본향인 전주에 들러 여러 종친과 승전고를 울리며 자축한 곳이다. 이후 고종이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畢遺地)’라는 비문을 새겨 태조 이성계가 머무른 곳이라 전하고 있다. 인근에서 이목대와 양사재도 함께 볼 수 있다.
언덕을 내려와 이정표를 찾아 걷다보면 어느덧 전주향교에 다다른다. 지방 백성들의 교육기관으로 당시 유생들을(지금의 중·고등학생) 교육시킨 곳이다. 수령 420년, 둘레 10.4m, 수고 32m에 달한 은행나무는 전주향교가 터를 잡던 1603년 심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에는 은행나무가 선비 정신을 상징해 향교에는 필수적으로 식재됐다고 한다.
가을이면 노란 낙엽비가 내리는 전주향교는 구르미 그린 달빛, 성균관스캔들과 같은 드라마 촬영지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날은 앙상한 가지만 자리해 가을 전경에 대한 아쉬움을 남겨둬야 했다.
전주향교를 뒤로 다시금 걷다보면 자연스레 전주천을 만난다. 전주천은 1급수가 흐르는 자연하천으로 탈바꿈해 천연기념물인 수달과 원앙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전주천 뒤로는 창암 이삼만 선생의 부채이야기가 전해오는 한벽루가 있다. ‘한벽청연(寒碧晴烟)’ 맑은 물소리, 시원한 바람소리를 바로 곁에서 느끼고 싶던 그 마음이라 하여 전주 10경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15호인 한벽루는 밤이면 조명으로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한벽루 인근엔 벽화마을로 SNS 등에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자만 벽화마을도 인접해 있다. 관광객의 경우 자만 벽화마을을 찾아 소소한 벽화를 감상하며 동심을 떠올리는 것도 좋을 듯하다. 승암산 자락에 위치한 달동네 자만 벽화마을은 2012년 40여채 주택 담벼락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한벽루를 지나 얼마지 않아 물고기를 닮은 건축물이 나온다. 1급수에서 볼 수 있는 민물고기 쉬리를 형상화한 자연생태박물관이다. 청정 전주천에 서식하는 물고기와 야생화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생태체험학습장이며, 아름다운 전주천의 사계와 함께하는 생태관광 중심축으로 지라한 친환경 휴식공간이다. 야생화 학습과 나비 변태 과정을 관찰할 수 있고 전주천에서 자라는 큰개불알풀, 방가지똥, 기생초 등 수많은 식물을 확인할 수 있다.
한벽루와 자연생태박물관을 지나면 한옥마을 주차장인 치명자산주차장이다. 인근에 숭고한 순교정신을 기리는 치명자산성지를 볼 수 있다. ‘진주 중의 진주’라고 찬탄하는 동정부부순교자의 순결한 선심과 고매한 덕행 그리고 숭고한 순교정신을 기리고 있다. 또 1994년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성당이 있고 그 아래 왼편에는 가파른 산길을 걸으며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
치명자산성지를 지나 각시바위에 도달하자 어느새 이마와 등줄기에 땀방울이 맺혀 온다. 전주천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땀방울을 씻겨갔다. 각시바위는 학이 이어준 애틋한 사랑과 이별이 내려오는 곳으로, 1403년 조선 태종 3년 원님의 딸 연화낭자와 정판서의 손자 정용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정용이 호랑이에게 숨을 거둬 전주천을 떠내려 오자 연화낭자가 전주천에 몸을 던졌다 해서 각시바위로 불렸다.
각시바위를 끝으로 다시 되돌아오면 숨길도 어느덧 끝을 맺는다. 한옥마을 외곽을 둘러보는 숨길은 북적이는 한옥마을 중심을 벗어나 조용히 거니는 코스다. 이름 그대로 숨을 내쉬며 한적하게 마음의 안정을 찾기 좋을 듯하다. 성큼 다가온 봄 숨길은 물론, 길마다 이야기를 담고 있는 한옥마을 둘레길을 거닐면 어떠할까./권순재기자·aonglh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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