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 선사 승탑과 탑비

경남 해인사. 해인사는 유명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사찰로 법보종찰(法寶宗刹)이라고도 한다. 가야산 아래 해인사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이름이 높다. 특히 골골마다 자리한 수십 여 개 암자는 해인사의 위엄을 받치고 있다. 성철 스님이 머물렀던 백련암, 장수에서 태어난 백용성 조사의 유훈을 기리는 용탑선원을 비롯해서 홍제암, 원당암 등 웬만한 크기의 사찰에 버금가는 암자들이 자리한다.

3월 두 번째 주말, 해인사 경내에 들어섰다. 부드러운 봄바람이 상쾌한 산 공기와 함께 가득하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는 장경판전을 둘러보고 고운 신라말기 학자인 최치원이 말년에 머물렀다는 학사대에 멈췄다. 당시 최치원이 꽃아 놓았다고 전해지는 전나무지팡이가 지금까지 살아 있다.
해인사에서 용탑선원을 가려면 가야산 정상 부근에서 내려온 폭 6~7m정도 되는 계곡을 가로 지르는 작은 다리를 건너야 한다. 지금은 돌로 번듯하게 만들어진 극락교가 있지만 전에는 그 아래 있는 폭 1m가 채 안 되는 외나무다리가 전부였다고 한다.
“외나무다리는 숭유억불 정책이 행해진 조선시대때 말을 탄 양반이 법당 앞까지 들어오는 행패를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하며 언제부턴가 이 다리를 건너야 극락에 도달한다는 속설이 전해진다.<외나무다리 안내판>
용탑선원은 전북과 인연이 있는 암자다.
‘월간 해인’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해인>에 해인사 암자를 소개하는 글을 싣고 있는 김형미 시인의 용탑선원에 대해 적은 이야기다.

“해인사에서 외나무다리 건너 가야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용탑선원. 1945년 용성 스님의 승탑과 탑비를 수호관리하기 위하여 창건되어 용탑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 대표는 용성·용운 2인이었는데, 그 중 한 분이 백용성(白龍城) 스님이다. 만해 한용운 스님의 사형이면서 한국 불교 사상 처음으로 한글판 금강경과 <조선글 화엄경>을 펴내기도 하여 “세종대왕도 못했던 일”이라며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용운 스님의 <님의 침묵>이란 시의 ‘님’이 용성 스님을 지칭한다는 얘기도 있어 귀가 솔깃했다. 특히나 용성스님은 깨달은 스님으로 알려져 있는데, 불교계에서는 조선 후기의 불맥인 지안 조사가 135년 만에 용성스님으로 환생하였다고 전해진다. 1917년 즈음하여 단군 왕검의 현몽을 꾸고 박성빈에게 금오산으로 적을 옮기도록 조언하여 그의 처에게서 잉태된 아이가 훗날 박정희 대통령이었다는 얘기도 흥미진진하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백용성 조사의 생가는 장수. 1864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출가해 해인사에서 불문에 입문했고 3.1운동으로 체포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불교종단의 정화를 위하여 힘썼고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촉진하기 위하여 한문을 한글로 번역하는 저술에 진력을 다하였다. 1922년 중국 연길에 대각교당(大覺敎當)을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했고 1940년 2월  나이 77세, 법랍 61세에 입적했다. 현재 생가터는 죽림정사라는 이름으로 성역화해 기념관 등이 조성돼 있다.
용탑선원에서 홍제암 사이에는 용성 선사 승탑 및 탑비가 나란히 서있다. 경남 유형문화재 492호다. 입적 일년 후 1941년에 사리탑비가 조성됐다. 이 곳을 지나면 임진왜란때 활약한 사명대사의 부도 및 석장비를 만난다. 보물 1301호. 사명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석과 사리를 봉안한 부도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이곳에 은거하던 사명대사는 광해군 2년에 속세 나이 예순일곱으로 이 암자에서 입적했다.
아름다운 홍제암은 거쳐 백련암으로 향한다. 백련암은 백련암은 산내 암자 가운데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여 한가할 뿐 아니라 경계 또한 탁 트여 시원하다. 특히 암자 주변에 우거진 노송과 환적대, 절상대, 용각대, 신선대와 같은 기암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어 예부터 백련암터를 가야산의 으뜸가는 절승지로 일컬어 왔다. 성철스님께서 입적하기 전까지 주석한 암자로도 유명하다.
백련암을 들리기 전 입구를 지나친 국일암(國一庵). 나라 ‘국’을 사용하는 암자다. 벽암 각성대사가 인조 15년 곧 서기 1637년에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벽암스님은 일찍이 글씨와 군법에 능통한 스님으로, 조선조 인조임금 때에 남한산성을 축성한 공적으로 인조임금으로부터 원조국일대선사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국일암이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됐다.
화려하지 않은 비구니 사찰로 가지런한 장독대가 눈에 띈다. 바닥이 뻥 뚫려 있는 오래된 해우소도 어색하지 않다. 소박한 주방에서 차 한잔을 공양받았다.
더도 덜도 없는 암자. 주지 지은스님은 “국일암은 마음이 편한 곳”이라고 한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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