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준 무역협회 전북본부장

국내 대학교에 러시아어가 개설된 곳이 육군사관학교를 포함해서 세 곳 밖에 없던 때였으니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러시아와의 인연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교 2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우연하게 읽어보고 그때부터 막연히 러시아를 동경하기 시작하였다.

동?서 냉전의 시대적 배경 속에 이데올로기 대립이 첨예했던 80년대 초, 대학전공을 러시아어로 선택했을 때 나에게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 아래에서 반공 이데올로기가 이땅의 태어난 사람들의 천명이자 시대적 소명으로 받아들여지던 그 당시에, 악의 축으로 여겨지던 소련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자 도박이었다.

  청바지와 통기타와 함께 7080 세대의 대학문화의 아이콘이었던 미팅에 나갈 때마다 러시아어를 배운다고 하면 무척 신기 내지 의아해 하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것저것 묻던 여학생들의 눈빛이 요즘도 가끔 생각나기도 한다. 러시아어를 배워서 어디다 쓸 수 있을는지에 대한 의문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살림살이에 비해서 많이 부족했던 그 당시 쓸모와 효용이 중요했지만 배움에 어찌 그것만이 전부이랴!

  러시아는 인류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볼쉐비키 혁명을 통해서 사회주의 국가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역사적 시험이 70여년 만에 실패로 종결된 이후 러시아는 과감하게 자본주의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이후 10여년간 극심한 사회적, 경제적 혼란을 겪었다. 마피아와 연관된 총체적 부정?부패는 체제 전환기 러시아의 상징으로까지 각인되어 있다. 러시아 사회의 어두운 일면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지만, 이것이 평가의 전부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또한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실패하기는 했지만 사회주의 정권 수립은 인류역사상 최초였으며 이외에도 러시아인들의 손을 통해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오는 인류사적 업적과 과학?기술적 성취도 상당하다. 2차 대전이후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을 제치고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공위성과 유인 우주선을 발사했고, (평가를 차치한다면) ‘짜르 봄바(폭탄의 제왕)’라는 당시 가장 강력한 수소 폭탄 폭발 시험에 성공하기도 했다.

    러시아인들의 천재적인 역량과 재능이 비단 과학기술분야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철학과 문학, 음악, 미술, 무용, 체육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러시아인들의 기여는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지구 대륙 면적의 1/7을 차지하며 동쪽 베링해에서 서쪽 발트해까지 무려 1만여 Km의 거리에 국내적으로 11시간의 시차가 나는 광활하고 다채로운 대자연의 보고를 자랑하는 러시아를 대한민국 국민을 떠나서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의 한명으로서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이번 남?북간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북?미간 대화의 물꼬가 터지면서 주변 4강국중 미국과 중국, 일본과 비교했을 때 영향력과 잠재력 측면에서 그 동안 지나치게 과소평가 되어 있던 러시아에 대한 우리의 관심과 인식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너무나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대륙임에도 불구하고 단절된 섬으로 밖에 활용되지 못하던 우리 한반도와 한민족이 특유의 역동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도래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제조업 능력과 상업화 기술의 우리나라와 세계적인 기초 과학기술력을 보유한 러시아 그리고 저렴하고 풍부한 양질의 노동력에 철도와 도로 등 물류의 중심지로 역할을 할 수 있는 북한 등 남-북-러 3국이 협력을 이룰 수 있다면 3개국 모두가 윈-윈 할 수 있는 환상의 3각 편대가 될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의 열기가 뜨거웠던 그 해 여름,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를 거쳐서 발트해의 상트 페테스부르그까지 러시아 대륙을 열차로 횡단했을 때 느꼈던 환희와 감동으로 이번 6월을 기다린다. 러시아에서 개최되는 월드컵의 흥분이 기다려지고, 북미회담의 성공적인 마무리로 한반도의 평화정착이 기다려지고, 이와 함께 비로소 하나되는 한반도와 러시아 대륙과의 역사적인 만남이 기다려진다.

  유라시아 횡단열차타고 서울에서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모스크바를 지나서 베를린, 파리, 로마, 마드리드, 런던까지 갈 수 있는 그 날이 멀지 않았다. 한반도와 한민족 웅비의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러시아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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