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환 전주시설공단 이사장

서울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뻥 뚫린 고속도로. 8차선 10차선으로 넓고 시원하고 빠릅니다. 커다란 산이 가로막고 있으면 10리쯤은 식은 죽 먹듯 직선 터널로 뚫어 버립니다. 깊은 골짜기가 나타나도 느리고 번거롭게 오르락내리락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층아파트보다 높은 교각을 세워 평평하게 길을 만들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세계 수준을 자랑하는 초일류 토목기술 앞에서 치악산, 오대산, 설악산도 벌벌 떨며 몸을 내놓았을 것입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편리함과 효율에 대한 집착은 가히 중독적입니다. 모든 일이 그렇듯 중독에는 만만찮은 대가가 따르죠. 경제적 효율성과 속도에 대한 숭배, 그리고 거대한 건설기계의 굉음 속에서 이 땅의 자연은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그뿐인가요? 운전은 단조롭다 못해 졸음이 쏟아집니다. 졸음과 싸우며 두어 시간 달리다보면 도깨비 방망이 두드린 듯 푸른 동해바다가 홀연 나타납니다. 산등성이를 따라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난 서울-속초 간 46번 국도는 이제 적막강산이 되었습니다. 수줍은 시골 색시 같던 그 오랜 국도는 이제 돌아보는 사람 없이 외롭고 쓸쓸합니다. 버려진 조강지처 같습니다. 사람들은 화려함을 좇고, 편리함에 중독되고, 속도와 효율의 숭배자가 되어 글래머 여인처럼 쭉 빠진 8차선 고속도로로 몰려듭니다.
  우리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을까요? 여정의 풍성함과 기분 좋은 긴장, 그리고 다채로운 이야깃거리들은 사라지고 빠른 도착이라는 단조로움만 손에 쥔 건 아닐까요? 어딘가를 간다는 행위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그 이상의 과정이고 모험이며, 경험이어야 하는 것 아니던가요? 주변의 아름다움과 계절의 변화를 느껴볼 여유도 없이 목적지에 그렇게 빨리 도착해서 어떤 가치 있는 시간을 누리고 행복했을까요?
  우리가 영화와 드라마를 즐기는 이유는 주인공의 우여곡절, 온갖 복선과 빗나간 추측의 긴장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압축 생략해버리고 결말만 알아버리면 무슨 재미가 있을까요?
  허영자 시인의 <완행열차>라는 시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 하마터면 나 모를 뻔 하였지 /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 된 일이다. /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철없고 낭만적인 소리라고 힐난할지 모르겠지만, 고속도로는 이제 그만 건설했으면 좋겠습니다. 물류와 이동의 효율성 등 메마른 경제적 타당성만 따질 것이 아니라, 대규모 토목공사로 파괴되는 우리 삶의 진짜 소중한 것들의 가치를 깊이 고민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마어마한 예산이 투입되는 고속도로 건설로 마을이 갈라지고, 논밭이 줄어들고, 산과 골짜기가 파괴되고, 동물들이 죽어나가고, 사람들은 점점 더 조급해지고, 교통사고 사망자가 늘어나는데 이것을 경제성장이요 발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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