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우영

  정우영 시인이 8년여 만에 네 번째 시집 <활에 기대다>(반걸음)을 냈다.
  등단 이후 30년 동안 네 권의 시집은, 적은 축에 속한다. 물론 그 사이에 두 권의 ‘시평에세이’가 있지만 확실히 정우영 시인의 걸음걸이는 달팽이에 버금간다. 한번 걸을 때 한걸음씩 떼지 않고 정말 반걸음씩 떼는 속도이니 말이다. 시인들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겠으나 정우영 시인의 경우는 작품을 읽어보면 언뜻 그럴 수 있겠다는 수긍이 온다. 마치 문명의 속도와는 별 상관없다는 듯 여기저기 해찰하며 걷는 모양새를 닮았다.   
   “발자국은 나를 떠나/저 너머로 뒷걸음쳐 갔으나,/차마 이별을 고하진 못하고 되돌아와/다시 내 발밑을 받친다./발자국이 없으면 어쩔 뻔했나./내 삶을 부양한 것은 저 수많은 발자국들.”_<‘눈길-설날 아침’ 부분>
  위 시에서도 느낄 수 있듯 정우영의 시에서는 사람의 정신을 현란하게 하는 ‘속도’가 없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사실 속도와 속도로 짜여진 매트릭스에 가깝다. 그 매트릭스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속도를 갖는다. 그런데 정우영의 시에서는 그런 경쟁적인 속도가 배제된다. 대신 어떤 방향이 존재한다. 위 시에서도 “발자국”은 “저 너머로 뒷걸음쳐 갔으나” 다시 돌아와 “내 삶을 부양”하고 있다.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것들과의 교감은 그의 시에 인위적인 속도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정우영의 시가 속도 대신 방향을 가졌다는 증거는 시집에 넘쳐 난다. 다리 부러진 안경에 생명을 불어 넣은 ‘달리는 무어라 부를까’에 안경은 단지 ‘신체의 연장’이 아니라 진짜 목숨붙이가 된다.
  이런 그이기에 사회적 죽음을 당한 존재들에게도 절대 무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세월호와 함께 버려진 목숨들에게나, 야만스러운 정권이 죽인 강이나 해군기지를 만들기 위해 파괴당한 제주 강정마을의 구럼비에게도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1960년 임실 출생. 1989년 <민중시>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마른 것들은 제 속으로 젖는다> <집이 떠나갔다> <살구꽃 그림자>가 있고, 시평에세이 <이 갸륵한 시들의 속삭임> <시는 벅차다>를 펴냈다.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신동엽학회장을 맡고 있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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